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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은 상징을 찾아가는 인문학이다
모로코

모로코 (라바트와 볼루빌리스)

by 두루가이드 2014. 1. 3.

카사블랑카에서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를 경유해서 로마 유적지 볼루비리스를 경유해서 페스로 들어가려한다.

<동선> 카사블랑카-라바트(수도)-볼루빌리스(로마 유적지)-페스(중세 이슬람 도시)-이프란(아틀라스 산맥 스키 리조트)

위성으로 보면 아트라스 산맥 북단이어서 녹지대가 많음을 볼 수 있다.

비도 자주와서 농사에 적합하다. 때문에 모로코는 수 많은 왕조들이 생겼다 사라졌다.

페니키아-카르타고-로마-반달-고트족-아랍제국-그리고 베르베르인이 세운 여러 왕국들이다. 

 

라바는 모로코의 수도이다.

모로코에서 6번재로 큰 도시이며 인구는 70만명 정도이다.

Rabat라는 의미는 "요새화된 궁전"을 뜻한다.

라바트에는 보우레그레그(Bourgerge)라는 강이 흐르며 강 위는 주요 도시 살레(Sale)가 자리하면

그 아래쪽이 라바트(Rabat)이다.

강이 실어 나르는 퇴적물 때문에 항구로서의 재 구실을 하지 못하는 곳이지만

직물과 가공식물과 건설이 발달한 곳이며 수도이기 때문에 외국 대사관들이 모여 있어서 

매우 중요한 도시의 기능을 수행 하고 있다.

2013년 CNN발표로는 꼭 가볼만 여행지 중 2위라고 발표하면서 관광객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다.



라바트에 거대한 국왕의 궁전이 있다. 5개의 궁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내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어서 걍 통과만 했다. 일정이 바빠서 대문도 안찍고 나왔음다. 으이그~!

 

1147년 이후 라바트는 이베리아 반도(스페인, 푸로투칼) 공격을 위한 공격포인트를 만들기 위해서 요새화되 성을 건설했다.

1170년 군사적인 중요성 때문에 이곳을  Ribatu l-Fath라 불렀는데 "승리의 요새"라는 의미이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해안 도시는 우다야 성채(Casbah of te Udayas)로 12세기 모하트(Almohard) 왕조 시절에 세운 도시이다.
알모하트 왕조(1121-1269)는 베르베르 무슬림들이 세운 막강했던 왕조로 알모하트는 유일신주의자 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라바트를 포위해서 이전에 있었던 알모라비트 왕조가 쌓았던 성을 무너뜨리고 그 곳에 새로 만든 성이다.
그리고 궁전을 만들고 모스크를 세웠다. 이 때 조상의 이름을 따서 알마디야(al-Mahdiyya)라 였다.

 

알모하트는 스페인 남부지방(발렌시아, 세비아, 코르도바,그라나다 그리고 지금은 리스본까지)을 차지했다.

처음엔 마라케쉬 남쪽 1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생겨 났는데점점 영역을 넓혀서 북아프리카 일대(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를 차지했고 스페인의 남쪽을 차지했다. 

 

아래 지도에서 보면 1145년 전투 이후에 커졌다가 1212년 스페인에서 기독교 연합군과 알 안달루스 전투에서 패하면서 축소 되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카스티야, 아라곤 왕국과 푸루투칼의 공격으로 그라나다 지역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들의 남긴 흔적은 방대하다. 스페인에서부터 북아프리카 일대에 많은 건축물과 흔적을 남겼다. 

 

전성기 알모하드 왕조의 칼리프 야쿠브 알 만수르(Yaqub al-Mansur)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라바트 도시 성벽을 건설했다.

해변에 솟은 우다야 성채도 당시 만들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큰 모스크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고 나서 건설은 중단 되었다. 아래 그림의 장소는 그 미완성 모스크 장소이며

지금은 현 국왕의 집안의 무덤이 있는 곳이어서 말탄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말탄 병사들은 무어인(베르베르+아랍인)들이다.

 

(아래는 미완성 모스크에 남아 있는 하산타워. 뒤로는 대서양이 보인다.

사암으로 만들었는데 86미터를 만들 계획이었지만 44미터에서 중단 되었다.

미나레트(타워) 내부엔 계단이 아닌 경사로를 설치해서 말을 타고 아잔하는 사람이 올라가게 했다.

이 타워를 세운 하비르(Jabir)는 자매 탑인 세비야 대성당의 종탑으로 변한 지랄다(Giralda)타워를 설계 했고

마라케쉬의 꾸투비아 모스크의 미나레트를 설계 했는데 모두 같은 모습이다.

200개의 기둥을 보면 얼마나 큰 규모 였는지 실감이 난다.)

야쿠브의 죽음으로 인해서 왕국은 점점 기울어져 갔다.

이베리아 반도의 많은 부분을 잃었고 북아프리카 역시 많은 부분을 잃었다.

이후로 경제력은 페즈(Fez)로 옮겨가게 되었다. (Fez는 다음에 나올 도시)

1515년 무어인 여행가 엘 와산(El Wassan)은 100채의 집만 남았다고 썼다.

라바트가 다시 부활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스페인에서 쫒겨난 무어인들에 의해서 이다.

그리고 1627년엔 고대 도시 살라와 함께 베르베르 해적들의 소굴이 되었다. 

해적들을 강의 이름을 딴 보우 레그레그 자치 독립 공화국을 세웠다.

주변 국가들이 이들을 제압하려 했지만 어떻게 할 수 가 없었다.

1818년에 겨우 제압을 했지만 라바트 항구는 해적들이 이용했다.

그러다 합스브르크의 오스트리아 배를 공격했는데 이게 화근이 되어서 오스트리아 배들이 대포로 공격을 해서 파괴 되었다.

 

1912년 프랑스가 모로코에 공격을 가해서 보호국을 설치했다.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프랑스는 수도를 페즈에서 라바트로 옮겼다. 

아무래도 접근이 쉬운 항구가 있는 곳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립을 꿈꾸는 사람들 때문에 페즈가 불안한 도시가 되어서 술탄은 프랑스의 결정에 따라 수도를 옮겼다.

프랑스는 프랑스 건축가를 불러서 행정지역을 만들고 새로운 도심을 만들었다. 

1956년 모로코가 독립을 했을 때 왕 모하메드 5세는 수도를 라바트에 둘 것을 결정했다.  

(아래 사진은 하산타워가 있는 미완성 모스크 바로 앞에 자리한 건물.

 현 국왕의 할아버지 무하마트 5세의 무덤이다. 그후 그 의 두 아들인 하산2세와 아브달라 왕자를 같이 묻었다.)

 

많은 비용을 들여서 조성한 만큼 대단한 위용을 자랑한다.

모로코 알라위트 왕조 건축의 걸작으로 꼽는 것으로 흰색과 초록 지붕이 잘 어울린다.

초록은 이슬람을 상징한다.

 

누구든지 무덤에 들어와서 사진 촬영도 할 수 있게 해 놨다.

가운데가 무하마드5세이고 멀리 양쪽에 두 아들인 하산2세와 왕자이다.

꾸란을 읽는 사람이 자주보이는데 사진에 담을  당시는 그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기타 부속 건물의 모습도 전형적인 이슬람 문양으로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다.

 

점심은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지역 이슬람 전통음 식인 꾸스꾸스이다.

노란색 통밀과 당근, 호박 등 야채에 고기를 넣어서 푹 삶은 것으로 맛이 기막히다.

유럽보다 월등히 선진국이었던 역사와 문화의 흔적은 음식에서 찾는다.

 

긴 하루 이기 대문에 이제 동쪽 내륙으로 들어간다.

아틀라스 산맥 북단이어서 비옥한 농토를 보면서 달리면서 보는 풍경은

유럽의 다른 국가와 다를바 없다.

 

페즈(Fez)에 가기 전에 거친 곳은 볼루빌리스(Volubilis)로마 유적지이다.

유적지 입구에서 보이는 모습은 포룸과 신전이 있는 곳이다.

볼루 빌리스라는 의미는 "아침의 영광"이라는 뜻이다.

농사자 잘되는 넓고 평평한 땅에 자리한 곳으로 기원전 3세기 페니키아인이 거주지 였다가

카르타고인들이 차지했고 기원전 1세기부터 로마의 영역이 되었다.

로마 기간은 240년이다.

그러나 사실 별 볼일 없다. 마치 신라시대 왕궁터를 보는 느낌이랄까.

 

로마가 차지하고 나서 빠르게 발전한 곳이긴 하다.

로마가 영역을 황장한 여러 이유중엔 농경지가 있었다.

밀 생산성이 높았고 나무가 많아서 벌채를 하기 위해서 이 곳에 도시를 확장 시켰다.

아래 그림은 중심 대로(데쿠마누스 막시무스)였던 곳으로 상인들이 집들이 즐비하다.

멀리 보이는 문은 세우타(탕헤르)로 향하는 길이다.

도시 면적은 약 100에이커(약 12만평에 해당하는 곳이다.)

도시를 두르는 다각형 담벼락이 2.6킬로미터 이다.

 

위 그림에서 멀리 보이는 문은 아래 그림의 북쪽 Tingis Gate(탕헤르 문)이다.

 

 

로마인들의 흔적으로 목욕탕이었던 곳에 모자이크가 남아 있다.

마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고대 문자엔 불교의 만자(卍)에 해당하는 문양이 있다.

이는 하도와 낙서에서 하도에서 파생된 그림이다.

이 곳 바닥에 만자가 보이는데 이런 모양은 전 유럽에 걸쳐 초기 기독교 문명 유적지에도 나타난다.

 

위와 같은 모습을 다르게 본 그림

 

물을 담아서 물을 받아서 쓰던 곳.

 

헤라클레스의 7가지 노역을 표현한 모자이크.

 

정말 다양한 모습이 남아 있다.

도시는 올리브 생산지역에서부터 모자이크 바닥이 깔려있는 섬세한 건물이 있는 지역으로 나뉜다. 

 

로마 시민의 집(에페부스의 집) 모자이크. 표범위에 올라탄 바쿠스.

 

기원후 2세기가 되면서 다양한 건물들이 추가 되었다.  바실리카, 신전, 개선문 등이 있다.

아래는  AD217년 칼라칼라 장군의 개선문.

그의 어머니 율리아 도무나를 위해 지었다. 1930년도와 1960년도에 복원.

 

약 285년 도시는 인근 부족에 의해서 정복된 후 로마가 다시 탈환하지 못했다.

이유는 너무 외진 곳이고 로마제국의 남부이역인 북 아프리카를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후 700년간 도시가 유지 되었다.

라틴계 기독교 사회 다음 이슬람 거주자들이 살았다.

8세기 후반엔 이드리스 왕조의 아브달라가 살았다.

그는 이드리스 왕조의 창시자이자 모로코 국가의 창시자이다.

11세기 왕국의 수도가 Fez로 옮겨지면서 이 곳을 거의 폐허가 되었다.

아래 그림은 바실리카가 있었던 장소이다.

 

아래 그림은 도시의 신전이 있었던 곳이다.

멀리 보이는 마을은 약 5킬로 미터 떨어져 있는 몰라이 이드리스(Moulay Idriss)로

11세기 수도가 Fez로 옮겨진 후 이곳 주민들이 이주해서 새운 도시이다. 

 

몰라이 이드리스(Moulay Idriss)는 789년 Moulay Idriss 1세가 이슬람을 가지고 정착해서 이드리시(Idrisid)왕국을 세운 곳이다.

그 후 그의 이름이 도시의 이름이 되었다. 따라서 이곳은 모로코 인들의 가슴엔 매우 신성한 장소로 남아 있다.

이드리스는 알리의 혈통을 이어받은 예언자 무하마드의 혈통을 가진 왕조의 후손이다.

그러나 아바스(후에 강력한 아바스 왕조)가 봉기를 들고서 살육을 가할 때 유일하게 살아 남아서 서 아프리카로 도망온 인물이다. 그래서 이드리스 왕조를 세울 수 있었다.

 

 몰라이 이드리스 도시를 만들 때 볼루 빌리스 로마 도시의 돌을 가져다 만들었다.

18세기까지 볼루빌리스에서 대리석을 가져다 여러 도시에 이용되었다.

그래서 볼루빌리스가 남은 것이 별로 없다.


채석장 처럼 이용된 볼루 빌리스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로마 유적지 중 가장 별볼일 없는 곳이 되었다.

차라리 저 몰라이 이드리스로 가야 된다. 

역사적으로 모로코에서 가장 중요한 곳에 속하기 때문이다.

볼루빌리스를 건너 뛰고 Fez나 수도인 라바트에서 시간을 많이 투자 하는 것이 좋다. 

볼루 빌리스는 시간을 잡아먹는 아주 어중간한 엑스트라이기 때문이다.

이곳 현지인 가이드들도 이런 바보같은 일정을 왜 만들지 말라고 신신 당부하기도 했다. 

북 아프리카 로마 유적지는 알제리와 튀니지에 완전히 남아 있는 곳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안다면 주요 도시에 시간을 많이 투자해서 더 많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