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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은 상징을 찾아가는 인문학이다
이집트

이집트 쉽게 읽기-재미있는 이집트 이야기

by 두루가이드 2018. 2. 16.

<재미있는 이집트 이야기>

이집트라는 곳은....
일단 재미있다. 신기하고 유별나며 알수록 더 알고 싶어 진다.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을 따라 따뜻하고 농사짓기 좋은 곳에 사람들이 살면서 문명을 만들었다.
나일강을 벗어나자마자 서쪽은 끝없는 사라하 사막이고 남쪽도 험한 사막이며 동쪽 역시 사막과 홍해를 만난다.
이집트는 지역적으로 고립된 환경 속에서 오랫동안 독창적인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역사가 이어져 왔다.
외부에서 이집트를 쉽게 오갈 수 있는 통로는 북쪽밖에 없었다.  
북쪽에서 누군가 이집트로 침입하기 전에는 이집트가 크게 흔들리거나 변한 적이 없다.


(아래: 빅토리아 호수에서 시작되는 나일강은 길이 6,895km로 아마존강 다음으로 길며 아프리카에서 가장 길다. 폭은 2.8km, 깊이는 8-11m로 아프리카의 11개 국가를 지난다. 나일강이 만든 분지의 면적은 아프리카 전체면적의 약 10%가량으로 대한민국(남한) 면적의 35 배가량 된다. 나일강이 준 선물은 지금의 이집트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고대 이집트 문명은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와 너무나 차별적으로 발전했다.)

이집트는 나일강 상류 쪽에 있는 이집트와 하류 쪽에 있는 하이집트로 나뉘어 있었다.
파피루스를 상징하는 하이집트와 이집트 연꽃을 상징하는 상이집트는 기원전 3,100년 전설적인 메네스(또는 나메르) 왕에 의해서 통합이 되었다. 

(아래: 마네스 왕의 이야기를 다룬 판석. 좌측이 마네스 왕이 상이집트 왕관을 쓰고 적을 후려치고 있다. 호루스를 상징하는 매가 있고 신성한 소를 숭배했기 때문에 소의 모습이 가장 위에 있다.)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합했기 때문에 왕관도 통합을 했다.
아래 그림에서 좌측부터 상이집트 왕관(흰색), 하이집트 왕관(붉은색), 통합된 왕관(이중관)이다.
마네스 통합된 왕관을 사용했다.

그런데 마네스 왕이 존재했는지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이집트를 통합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인물로 그려졌다고 하면서 마네스에 대해선 반은 전설이고 반은 진짜라고 한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가장 유명한 신들의 이야기를 할 때 마네스는 상하 이집트를 통합한 신인 호루스일 것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인 호루스는 호루스는 자신의 삼촌인 세티와의 전쟁을 통해서 이긴 후 상하 이집트를 통합한 신이기 때문이다. 

(아래: 이시스, 오시리스, 호루스. 매의 얼굴을 한 호루스는 상하이집트 통합 관을 쓰고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들은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았기 때문에 살아서는 호루스로 살고, 죽어서는 명계의 신인 오시리스의 삶을 산다고 믿었다. 오시리스가 죽은자들이 거치는 명계의 신이 된 것은 그의 동생 세티에게 두 번째 죽음을 당하면서 몸이 14조각으로 잘렸을 때 이시스가 사체를 수습했는데 오시리스의 성기에 만은 못 찾았다. 그래서 죽음 후 명계의 신으로 남게 되었다.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사체 조각들을 천으로 감싸야했기 때문에 파라오가 죽으면 미라로 만들고 천으로 감싸는 의식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초기왕국-고왕국- 중왕국 까지는 발전을 거듭해왔다. 피라미드를 만들고 그 속에 파라오 시신을 안치해왔다. 그러다 아시아 기마민족 힉소스가 쳐들어오면서 이집트는 완전히 바뀌게 된다.
힉소스는 말을 잘 다루었으며, 말이 끄는 전차를 가지고 신출귀몰하게 싸웠고 조립이 되는 활과 전투용 칼을 가지고 와서 이집트를 정복했다.

하이집트는 힉소스인들이 차지했고 테베(지금의 룩소르가 중심인 지역) 상이집트는 이집트인들이 지배를 했다. 약 200년간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나뉘어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힉소스인들이 들어올 때 가나안에 살던 샘족들도 같이 들어왔다. 
외부세계의 문명을 받아들이고 힉소스인들이 무기를 장착한 이집트인들은 힉소스인들을 몰아냈다. 그리고 외부세계로 정복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신왕국의 시작이다.

신왕국은 이집트 역사의 하이라이트 시대이면서 가장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시대이기도 하다.
피라미드를 만들지 않고 암굴 무덤과 신전을 만드는데 주력했다. 이집트 역사상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투트모세 3세가 나오기도 했다. 위대한 왕으로 칭하는 람세스 2세가 나온 시기이고, 황금관으로 유명한 투탕카멘 소년왕 시대이기도 했다.
파라오 아케나톤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태양신 아톤을 숭배하는 유일신교를 만들기도 해서 출애굽을 한 모세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 힘들게 고대 이집트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해 봤다.)

이집트 신왕조 시대에 가장 특이한 파라오들이 몇 있었는데 그중 18 왕조의 하쳅스투 여왕이 있었다. 
아버지는 투트모세 1세, 남편은 사촌 동생인 투트모세 2세 남편이 일찍 죽자 스스로 왕이 되었다. 남장을 하고 가짜 수염을 붙였고 이름도 남성 이름을 썼다.
그러나 새로운 왕이 있어야 된다는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어린 조카이자 양아들인 투트모세 3세를 왕자신의 딸과 결혼시켜서 사위이자 아들로 만들고 왕으로 내세워서 섭정을 했다. 선대왕들이 했던 전쟁보다 주로 경제를 발전시켰다. 커다란 배를 만들어서 외국에 보내서 무역을 했다.
"신비한 땅에서 싣고 온 각종 나무와 수많은 종류의 나무, 흑단, 상아, 황금과 은, 비비 원숭이, 긴 꼬리 원숭이,... 피부가 검은 사람들... 이집트의 어떤 왕조 이런 물건을 이집트에 가져온 적이 없다."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전해지는 이야기로 출애굽으로 유명한 모세(Mose)를 양아들로 삼고 키웠던 왕이기도 하다. (사실 이 내용은 정확하지 않다.)

(아래: 하쳅수트 여왕의 장례의 위해서 만든 장제전. 그러나 여왕이 갑자기 실종이 되었다. 기록이 없이 죽고 나서 투트모스 3세는 하쳅수트의 모든 흔적을 지워 버렸다. 이름을 지우는 것은 기본이고 얼굴을 다 파괴했다. 투트모스 3세는 자신의 어머니를 너무 싫어했기 다시 환생하지 못하게 이름과 얼굴을 지웠던 것이다.)

투트모세 3세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넓은 영역을 차지했다. 이집트 나폴레옹이라고 불린다. (이 것은 좀 웃기는 이야기이다. 나폴레옹은 투트모세 3세보다  수천년 후에 등장했는데 그 이전의 인물을 나폴레옹과 비슷하다는 표현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어이 없는 일인가?)
20년간 17번 원정을 가서 싸웠는데 이집트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 카데쉬를 점령했고 지금의 시리아까지 차지했고 남쪽으로는 이집트 나일강 제4폭포까지 영역을 넓혔다.
이집트에 포로들을 데리고 오면 이집트식 교육을 시키고 성인이 되었을 때 돌려보냈다. 그래야 이집트 속국으로 남을 수 있다고

(아래: 기원전 1,500년 이집트 최대 영역)

 

신왕조 시대에 왕들은 신전에 많은 전리품과 부동산을 갖다 바쳤다. 이집트에서 왕이 되려면 반드시 종교계의 승인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성직자들을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하쳅수트와 투트모세 3세가 왕위 다툼을 할 때 서로 지역 최고의 신 아몬-라 대신전의 성직자들에게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성직자가 정치에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어 버렸다. 성직자들은 왕실에 참여할 수 있게 한 투트모세 3세를 지지했고 투트모세 3세는 전쟁에 나가서 가져온 모든 전리품을 신전에 바쳤다. 부동산은 물론 한 도시를 바치기도 했고 노예를 바쳤기 때문에 신전엔 모든 것이 넘쳐났다. 나라에 재정을 어렵게 만든 것이다.

이후에 아멘호테프 4세(아크나톤)는 정치와 종교 개혁을 시행했는데 아몬 신을 버리고 태양신 아톤을 섬기는 유일신교를 만들었다.  개혁을 통해서 종교계의 힘을 약화시켜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리고 수도도 이집트 중심부에 있는 아마르나로 옮겼다.  그리고 이름도 아톤의 빛이라는 의미로 아크나톤이라고 바꿨다. 이집트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왕비인 네페르티티는 남편인 아크나톤의 개혁을 적극 지지했다.  아크나톤은 낮은 신분에서 시작해서 전쟁 때 공적을 세워왔다. 죽을힘을 내서 싸웠지만 성직자들에 비해서 돌아오는 것은 너무 미미했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과 노예들의 지지를 받았고 결국 파라오가 된 후 종교, 사회, 예술 등 모든 부분에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아톤 숭배가 점차 개인숭배로 바뀌어 나갔다. 게다가 전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리품이 없었고 군인들이 포상금을 받지 못했다. 여기저기 불만이 생겼고 결국 군대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서아시아 지배지역도 하나 둘 독립을 선언했다. 
결국 개혁을 실패했고 아크나톤이 죽은 후 아마르나는 파괴되었다. 아크나톤이라는 이름도 전부 지워졌다.

(아래: 강인하게 생긴 아크나톤의 길쭉한 얼굴. 나중에 자신이 신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갖추어야 된다고 해서 여성의 가슴이 달린 것처럼 조각을 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조각이나 기록들을 보면 실지로 가슴이 나왔던 것 같다. )

(아래: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에 있는 판석. 이 것을 보려고 전 세계인들이 줄을 선다는 돌이다. 아크나톤과 그의 부인 네페르티티 그리고 딸이 빚이 내려오는 태양신 아톤에게 꽃을 바치는 모습. 여기서도 아크나톤은 여성의 가슴이 달려있고 여성의 하체로 그려지고 있다.)

(아래: 화려하게 장식된 아크나톤의 미라 덮개)

(아래: 아크나톤이라는 이름이 지워진 모습. 다시 태어나지 못하도록 이름을 다 지웠다.)

(아래: 편두를 한 아크나톤의 딸 두상)

2,000 신위가 넘는 이집트 신들을 다 버리고 유일신을 만들었기 때문에 당시 모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