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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은 상징을 찾아가는 인문학이다
러시아

19세기의 사실을 그린 러시아 화가 바실리 베레시차긴

by 두루가이드 2018. 8. 1.

<러시아에서 만나는 명화>
 바실리 베레시차긴(Vasily Vereshchagin 1842-1904)

 

모스크바 트레티아코프 미술관에 가거나 상트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에 갔을 때 전쟁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림을 봤다면 틀림없이 바실리 베레시차긴의 그림이다.바실리 베레시차긴은 전쟁화가, 여행가, 언론인으로서 당대에 명성을 얻었던 인물이다. 러시아에서 거의 첫번째로 해외에 널리 알려진 미술가이기도 하다. 베레시차긴 이전에 전쟁그림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화려한 색채로 황제와 그의 군인들의 승리감을 매우 화려한 색채로 표현했다. 그러나 베레시차긴은 전쟁의 민 낯을 그대로 표현했다. 낭만적인 요소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잔혹하고 끔찍한 실상을 묘사했다. 너무 사실적이고 그래픽 같아서 당시엔 대부분의 그림들이 전시되지 못했었다.

 


(진혼곡. 터키와의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이 들판에 누워 있는 끔찍한 장면을 그렸다. 그림이 거대하기도 하지만 처음에 무엇을 그렸는지 몰랐다가 나중에 주검들이 널려 있는 장면에서 발을 움직일 수 없던 기억이 있다. 회색빛 들판과 우중충한 하늘은 비극을 깊게 만든다.)

 

그는 모스크바 북쪽 500km 떨어진 체레포베츠라는 지방 도시의 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황제의 해군으로 복무하면서 프리깃트 함을 타고 덴마크, 프랑스, 이집트를 다녔다. 졸업하자 마자 순수미술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었다. 1860년에 상트페테르브르크에 있는 제국미술학교에 들어갔고 3년 후에 떠났다.
그리고
1864년에 파리 순수미술학교에서 유명한 화가 장레옹 제롬(Jean-Léon Gérôme : 장레온 제롬은 화가이자 조각가로서 역사화, 그리스 신화, 오리엔탈리즘, 초상화 등을 그렸다. 아카데미 미술을 최고로 끌어 올려서 아카테미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장레옹 제롬의 <디오게네스>-그리스 자연주의 철학자)

 

(장레옹 제롬의 <뒤집은 엄지>-검투사들이 경기에서 군중들의 엄지를 지켜세우면 살려주고 뒤집으면 죽인다는 순간을 묘사)

 


(장레옴 제롬의 <기독교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콘스탄티누스 1세 이전의 로마시대에 기독교인은 걸리면 다 죽었다.)

 

베레시차긴은 "진짜 전쟁그림을 그리려 한다면 전쟁에 참전해서, 추위와 굶주림을 겪어보고, 부상과 죽음의 위험을 경험해 봐야 한다."고 믿었다.
대단한 용기를 가진 그는 마치 현대전에서 종전기자처럼 전쟁에 참여했다.
투르케스탄(Turkestan 중앙아시아 OOO스탄 국가들) 전쟁(1867-1870)
러시아-터키(Russian-Turkish) 전쟁(1877-1878)
러시아-일본(Russian-Japanese) 전쟁(1904)

그의 작품에는 적대감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폭력과 고통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을 담고 있다
.
투르케스탄 전쟁 시리즈 중 전쟁의 화신(The Apotheosis of war. 1871)라는 그림은 타인을 죽이는 잔혹한 상황을 고발했다. 전쟁에 패한 군인들이 잘린 목이 쌓여 피라미드처럼 해골 무더기가 되어있는 장면이다. 베레시차긴은 액자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새겼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위대한 정복자들에게 헌정한다.”라고 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 차르(황제) 정부는 그가 적군을 동정한다고 비난 하기도 했다.


(베레시차긴-아미르 티무르 게이트)

 

(베레시차긴-

전쟁의 화신

The Apotheosis of war. 1871-고대부터 전쟁이 끝나면 적군의 목을 잘라서 산더미처럼 쌓아두는 습성이 있었다. 이런 모습을 경관(京觀) 또는 촉루대(髑髏臺-해골 성)라 부른다. )




1873

년부터 정기적으로 세계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그림을 전시했다. 그는 어떤 작가협회에도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움직였다. 명예도 없고 지위도 버렸다. 1874년 아카데미 예술협회에서 교수라는 높은 지위를 주었지만 공식적으로 거절하면서 미술에서 모든 타이틀과 수상은 불필요하다는 생각을 전했다. 그를 포장하는 유일한 장식은 사마르칸트(현 우즈베키스탄의 문화도시)를 방어할 때 보여줬던 용감함으로 인해서 받은 성 조시 십자훈장뿐이다.

 

1877년 러시아는 오스만 튀르크의 오랜 지배에 대항하는 발칸 국가들의 전쟁에 끼어 들었다. 이 때 그린 발칸 시리즈는 그의 창작예술의 정점을 찍었다. 스스로 전쟁에서의 경험과 깊은 생각에서 나오는 작품들을 남겼다. 쉬프카 벌판(쉬프카의 스코벨레브 장군)이라는 그림과 죽은 자들의 진혼곡은 전쟁의 참상을 너무 잘 보여준다.
쉬프카 벌판은 흰색 눈이 죽음의 무덤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한쪽에서 사열한 병사들이 스코벨레브 장군을 환영하고 있다. 전쟁에서 한쪽의 기쁨은 다른 쪽의 죽음임을 보여준다.

(베레시차긴-쉬프카 벌판:스코벨레브 장군)

 

무엇보다 진혼곡(위 첫번째 그림)이라는 작품 앞에 섰을 때 무슨 그림인지 잘 알 수 없다가 들판에 끝도 없이 누워 있는 주검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그는 유럽은 물론 미국, 쿠바, 인도, 히말라야, 티벳, 시리아, 팔레스타인, 필리핀, 일본을 여행했다. 여행지의 다양한 문화를 공부해서 문화, 관습, 사람들의 일상, 문화재, 각국의 자연을 그렸다 


(베레시차긴-라다크의 해미스 수도원: 솟대처럼 솟아있는 장대가 곳곳에 보인다.)

 

(자이푸르의 말을 탄 전사)

 

(타지마할)

(도께비가 새겨진 옷을 입은 라마승려)
인도 북동쪽 네팔과 부탄 사이에 자리한 시킴(Sikkim)주에서 매년 불교 승려들이 도깨비를 비롯한 다양한 신의 모습으로 춤을 추는데 이것은 굼파(Gumpa)댄스라 한다. 이지역은 초기 불교인 본교가 나온 곳이기도 하다.

Gumpa 춤을 추는 승려들

 

(키르키스탄에서 신단수를 새운 이동식 주거지 유르트yurt. 몽골에선 게르ger라 부른다.)


1904
년 러-일 전쟁 때 러시아 조차지 뤼순으로 갔다. 여순함대 사령관 초대로 페트로파블로브스크 전투함을 탔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산동반도 끝에 자리한 요새 인근에서 두 개의 기뢰에 배가 폭발하면서 수병들과 함께 가라 앉았다. 적국이었던 일본에도 보도가 되어서 일본 사회주의 자들도 베레시차긴의 죽음에 대해서 추모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