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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은 상징을 찾아가는 인문학이다
요르단

<페트라> 인생 여행지 그리고 나바테안 문명

by 두루가이드 2019. 10. 14.

<페트라와 나바테안 문명>

나바테아 문명의 수도 페트라. 입구에서 협곡을 지났을 대 처음 만나는 보물창고. 아랍아어로 알-카즈네(Al-Khazneh)는 보물창고를 의미한다. 실제로 보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AD1세기 나바테아 왕(아레타스 4세 필로페트리)의 영묘로 만들어진 조각 같은 구조물로 사암을 깎아서 만들었다.
알카즈네(보물창고) 상층부의 모습-전설에 의하면 해적이 상층부 꼭대기에 있는 항아리에 보물을 숨겨 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서 보물창고라 했다고 한다. 사막에서 생활하는 베두인들이 항아리에 보물이 쏟아져 나오길 기대하면서 총을 쏴대서 총알 자국이 선명하다. 또다른 전설은 모세 시절 이집트 파라오의 보물창고라는 전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2천년이 지나면서 건물 외벽에 새겨진 조각들이 많이 훼손되었다. 

나무나 유명한 페트라는 알아도 <나바테안 문명>은 생소하다.
사실 사진을 찍고 여행하는데 생소한 이름 나바테안 문명을 몰라도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9년 9월 말 '은둔의 이슬람 왕국' 사우디 아라비아가 문호를 개방했다.
무하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주도하는 프로젝트 비전 2030의 핵심이 사우디 개방이다. 절대적인 석유 의존도의 산업구조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으로 다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사우디가 관광의 문을 열면서 강조하는 지역은 나바테안 문명홍해 지역이다.

페트라가 나바테아 인들의 수도였다면 사우디아라비아 서북부의 알울라마다인 살레(살레의 도시들)는 상업지역으로 페트라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사막에 만들어진 아름답고 놀라운 알-울라(Al-Ula)와 마다인 살레(Mada'in Saleh)는 사진으로만 봐도 끌린다.

페트라에서 500km 남쪽에 자리한 사우디 아라비아 마다인 살레(Mada'in Saleh)에 있는 거대한 무덤. 암석을 깎아서 31개의 무덤이 섬세하게 장식했다. 다양한 조각에는 새, 사람의 얼굴, 상상속 존재를 넣어서 당시 종교를 보여준다.
사우디 아라비아 알울라 지역. 사막의 계곡

나바테아 인들은 어떻게 해서 페트라와 다양한 지역에 대단한 문명을 남길 수 있었을까?
페트라만 둘러보아도 고대 세계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 중에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1. 아라비아 반도를 잘 아는 뛰어난 유목민들이다.(목초지와 물이 있는 곳이면 소떼와 함께 어디든 이동했다.) 
2. 아라비아 반도 서쪽 예멘에서부터 시리아 쪽 레반트까지 향(신)료 무역로를 접수했다.
3. 사막에서 가장 중요한 물을 찾고, 물을 보관하고, 물을 운반하는 수로를 만드는 등 물에 관한 한 남다른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점 무역과 독점 기술이 있어야 부자가 되는 이치에 맞게 살았다.

그렇지만 나바테아 인들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매우 미미하다.
나바테아 인들은 글을 읽고 썼으며, 아랍어 문자를 개발했지만 자신들이 역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기랄... 역사를 잃어버렸으니 망한 후 새롭게 재건도 불가능했다.)
그들이 문화 관습 왕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 작가들에 의해서 쓰였다. 그들에 대해서 직접 알 수 있는 것은 남겨진 건축물, 예술품, 비문을 통해서 조금 알 뿐이다.

페트라. 사람들 뒤로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암반을 깎아서 만든 극장이 보인다. 
페트라 무덤 정면들
신전과 같이 생긴 거대한 왕의 무덤
페트라 왕들의 무덤의 정면
손님을 기다리는 당나귀와 멀리 보이는 정면의 거리(페트라 무덤군)
페트라 크랜드 템플로 알려진 곳
페트라 그랜드 템플로 알려진 곳

초기에 그들에게 기회가 온 것은 신 바빌론의 네브카트네자르(느부갓네살) 2세가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을 침공해서 솔로몬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다 노예로 잡아갔기 때문에 근처에 힘이 있는 정치권력의 공백기가 생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것을 바빌론 유수라고 하는데 이때 활력 있게 등장한 선수들이 나바테아 인들로 여겨진다.

나바테안 왕국은 BCE 4세기에서 AD 106년 사이에 지금의 요르단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체제를 갖춘 국가가 되었다. 페트라는 나바테안 왕국이 수도였다. 페트라 일대는 기원전 312년까지 부유한 공동체가 번성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학자들은 보통 나바테안 왕국의 첫 번째 왕이 나왔던 BCE168년부터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 AD 98-117)에 의해서 로마제국에 합병된 AD106년까지를 나바테안 왕국이라고 본다.

나바테아 인들은 사막에 사는 아라비아 유목민으로 처음엔 향신료 무역로를 통해서 재산을 모았다. 카타반(지금의 예멘)에서 사바(강력한 무역 중심지)를 통해서 아라비아 반도 서쪽 길을 따라 지중해의 가자지구까지 이어지는 길에서 무역을 했다. 그들의 지속적인 여행을 하는 동안 그 지역에 익숙하게 되었고 물의 원천을 찾고 보존하는 기술로 인해서 그들은 다른 곳보다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상품을 운송할 수 있게 했다.

페트라-빗물을 모았던 우물에 쉬고 있는 관광객

*그러나 수세기 동안 학자들은 왜 이런 곳에 도시를 만들었는지 알아내려고 머리가 좀 아팠다. 페트라는 사암 절벽을 깎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접근이 어려운 곳이고, 물을 얻을 수 있는 원천도 없으며 너무 척박해서 사람이 살만한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트라의 지정학적 위치는 실제로 여러 가지 큰 이점이 있었다. 향신료 상인들이 지나가는 곳이기 때문에 무역로에서 일어나는 일을 감시할 수 있었으며 외부에서 근접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곳이었기 때문에 카라반(대상)들을 보호하는 명목으로 세금을 받을 수 있었기 더 부유해질 수 있었다. *

서기 106년에 페트라가 로마에 합병되면서 현재 사우디에 있는 헤그라(Hegra: 지금의 마다인 살라) 같은 나바테아 인들의 도시들은 향료 무역의 지배권을 꾸준히 상실했다.
더욱이 시리아의 팔미라가 무역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나바테아 인들의 도시로부터 카라반(대상)들이 이탈해서 경제가 나빠졌고 도시의 명성도 떨어졌다.
기원후 272년 로마의 아우렐리안 황제가 팔미라를 파괴했지만 나바테아 인들의 도시 경제를 소생시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7세기 아랍이 침공할 즈음에 나바테아 왕국은 잊혀 있었다.

향료 길이라는 용어는 기원전 7/6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남부 아라비아와 지중해 가자 항구 사이에 나있는 여러 갈레(여러 육로, 해로)의 무역로를 지칭한다. 그러니까 하나의 길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바테아 인들은 기원전 3세기에 이 무역로 상에 있는 중요 도시를 장악해서 가장 수익성이 좋아진 것으로 보인다.

고대  나바테아 인들의 무역로.  페트라는 지중해 가자(GAZA) 항구에서 유럽으로 가는 배에 물건을 싣기 전 대상(카라반)들의 종착지 였다. 

로마의 박물학자이자 정치인, 군인이었던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또는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향료 길은 1,931km에 이르며 별일 없이 매일 밤 도시들을 경유하는데 65일이 걸렸다고 한다. 도시에서 하룻밤 머무는 것은 쉰다는 의미보다 중요한 비즈니스를 위함이다. 예를 들어 맘스히트는 비싼 아라비아 말이 유명했다. 상인들은 도시에서 도시를 이동하면서 최종 목적지인 가자 항구까지 가는 동안 물건을 사고팔고 했다. 어떤 도시가 상인들에게 세금을 과하게 매기면 상인들은 좀 더 호의적인 곳으로 옮겨갔다. 기원전 3세기가 되면서 나바테아 인들이 도시들을 장악하면서 상인들은 반드시 무역로를 택해서이 동해야만 했다.

할루자, 맘스히트, 아브다트, 시브타로 알려진 도시들은 무역에 필요한 물품은 물론 상인들에게 편안한 숙소가 제공되었다.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바테아 인들의 요새가 세워졌고, 안전을 보장받은 상인들은 추가 세금을 내야 했다. 나바테아 인들은 이동하는 상인들로 기원전 3세기에 이미 부자가 되었지만 왕국을 세우고 난 후 향료 무역을 더욱 확고히 지배하기 위해서 더욱 재산을 모았다.

나바테아 인들이 무역을 통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역로에 물을 잘 관리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다른 아라비아 상인들에게 물은 교환을 해야 되는 즉, 돈 주고 사야 되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나바테아 인들은 빗물로 가득 채워진 물탱크를 파서 덮었고 그들만이 알 수 있는 특별한 표식을 해두었다. 이런 정책으로 인해서 그들은 무역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더 쉽게 여행할 수 있었다. **

나베테아 인들이 여행하면서 사용하기 위해 만든 물저장소. 
페트라 협곡에 남아 있는 수로. 비가 오면 빗물을 흐르게 해서 물 저장고에 채웠다.
남아있는 물저장고의 모습. 바위를 깎아서 만들었다.


**그들의 기술적인 독창성은 페트라의 물 문제도 해결했다.
나바테아 인들은 그 시대에 비할 바 없이 정교한 물 수송 시스템과 저장 시스템을 만들어서 당시 경쟁자들이 감히 넘볼 수 없었다. 또한 페트라는 홍수에 취약했다. 페트라가 아닌 다른 곳에서 수십 밀리미터의 비가 오면 어느 순간 갑자기 페트라 계곡에서 거대한 물이 쏟아져 내렸다. 이 때문에 댐, 시궁창, 수로를 섬세하게 건설하여 건조한 지역에 인공 오아시스를 만들었다. 이런 기술력 때문에 페트라에 문화를 만들 수 있었고 이 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이 될 있었다.

정확하게 페트라와 마다인 살레(헤그라) 같은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기원전 4세기 후반까지 도시를 잘 만들었다. 그리고 그리스 장군 안티고누스 1세(나중에 왕이 된)가 페트라를 탐내고 있었다. 기원전 312년 안티고누스는 나바테아 인들과 친분을 가장해서 그의 아들 데메트리우스를 보내어 페트라를 기습 공격했다. 그러나 나바테아 인들이 속지 않았고 데메트리우스의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나바테아 인들과 타협을 해서 그의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두 사람 모두 나바테아 인들에게 쫓겨났고 나중에 약혼을 하게 되었다.
나바테아 인들 왕국의 막대한 부는 늘어났으며 그 시대에 전설이 되었다.

고대 세계의 한 역사학자인 디오도루스 시쿨루스(Diodorus Siculus-기원전 1세기)는 나바테아 인들의 풍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나바테아 인들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아랍 사람들의 관습을 어느 정도 상세하게 기술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습에 따라서 그들의 자유를 보존하려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적군이 얻을 수 있는 강물도 없고 우물도 없는 황무지 야외를 자신들이 토착지로 주장하며 살고 있다.
그들은 곡물을 심지도 않고, 과실수를 심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고, 집을 짓고 살지도 않는 것이 그들이 관습이다. 만약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형벌로 사형을 시켰다.
그들이 이런 관습을 따르는 것은 그런 물건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힘으로 그것을 팔라고 강요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낙타를 소유하거나, 양을 소유한 사람들은 사막의 초지에 풀어서 키운다.

사막을 목초지로 이용하는 많은 부족이 있지만 나바테아 인들은 그 수가 10만 명을 넘지 않지만 훨씬 부자들이다. 많은 나바테아 인들은 바다유향(종교의식 때 피우는 향)과 몰약 그리고 가장 값어치가 나가는 종류의 향신료를 아라비아의 유다에몬(풍요의 아라비아: 지금의 예멘)에서 온 상인들로부터 구입했다.

그들은 특히 자유를 누리고 있었으며 강한 적들이 가까이 오면 사막을 요새 삼아 사막으로 피했습니다. 적들에게 필요한 물이 부족해서 사막을 건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바테아 인들은 지하 저수지를 준비했기 때문에 안전하게 있을 수 있었다.

지구의 어떤 곳은 점토로 되어 있고 어떤 곳은 부드러운 바위로 되어 있어서 그들을 굴을 파고 들어가서 넓은 공간을 만든다. 입구는 작지만 내부는 점점 깊이 파고들어서 한 면이 30m가 될 정도의 큰 공간을 만든다. 내부 벽은 치장용 벽토를 발랐다. 그 공간에 빗물을 채워 넣어서 입구를 닫아 버리고 보통 땅바닥과 구별이 안 가게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외부인들은 알 수 없지만 그들만이 알 수 있는 특이한 표식을 해두었다.

폐허가 되어버린 물저장고. 우물 입구만 남아있다. 

그들은 이틀에 한 번씩 가축에게 물을 주었다. 그렇게 하면 만약 물이 없는 곳으로 도망친다 하더라고 가축에게 지속적으로 물을 공급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음식으로 가축의 고기와 우유 그리고 도망 다니는데 적합한 식물인 후추와 나무에서 따낸 꿀을 물과 섞어서 먹었다. "

그러나 같은 시대 다른 역사학자 스트라보(Strabo)는 나바테아 인들이 포도나무를 재배하고 연회 때 와인을 마셨다는 주장 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처럼 과음하지 않고 저녁 동안 11잔 이하로 제한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말 대신 낙타는 사용하고, 소매 없이 무릎까지 오는 헐렁한 옷(튜닌 tunics)이 아닌 상체를 드러내고 아랫도리만 걸치는 샅바(로인클로즈 loincloths)를 입었는지에 대해서 기술했다. 또한 그들의 왕은 연회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겠다고 주장할 정도로 민주적이었다고 쓰고 있다.

무엇보다 나바테아 인들의 문화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다고 여겨졌다.
명문에 의하면 여성들은 성직자였고, 공동 통치자 또는 자치 군주였으면 재산을 상속하고 처분할 수 있었고, 자신의 무덤을 소유하고, 소송을 제기했고, 법정에서 자신들을 대변했으며, 동전에 얼굴을 새겼다. 나바테안 판테온(만신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들 중 일부는 알우자, 마나와트, 알라트 같은 여성이었다.

기원전 9년 여왕 샤퀴라(Shaqulat)얼굴이 새겨진 동전
왕과 왕비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

페트라와 같은 유적을 둘러보면 이들이 <종교>는 매우 중요했을 듯하다.
그러나 그들이 다신교였으며 신전의 꼭대기에서 태양신을 숭배하고 집에서는 개인적으로 믿는 신에게 의식을 행했다는 것 이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남녀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는 사제 계급이 있었지만, 그중 한 사람이 어떻게 선택되었는지 성직자들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이집트처럼 남녀 성직자들은 사람들이 아닌 신들을 돌봤고 축제 이외는 어떤 공공 예배 시설도 없는 것 같다.

<페트라 신들>
나바테안 만신전(판테온)의 신들은 결코 본격적으로 성전에 표현된 것이 아니고 문간, 신전의 구석진 곳, 동전, 무덤, 도자기, 부적과 행운의 상징에 표현되었다.
나바테안 문화 초기에 가장 중요한 세 신은 다음과 같다.
알-카움(Al-Quam): 전쟁의 신, 국민의 수호신, 밤의 신, 영혼의 수호신
알-커트비(Al-Cutby): 지혜의 신, 글의 신, 점술의 신
알우자(Al'Uzza): 신과 땅의 힘과 연관된 최고의 어머니 여신.

이후에 마나와트(운명의 다신의 여신), 알라트(재생의 여신, 봄과 다산의 여신), 두샤라(태양과 연관된 산과 낮의 신)이 있다. 두샤라는 모든 신들 중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나바테안 신전의 옥상에서 숭배받는 신이었다. 마다인 살라에서는 독수리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신으로 두샤라는 로마에 의해서 합병이 되었어도 여전히 화폐에 등장했다. 아우구스 티누스(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를 기념해서 '악티아 두사리아'라는 이름을 새긴 로마 천년 기념 동전을 만들어서 두샤라를 찬양했다.

나바테아 인들의 도시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쇠퇴했다. 서기 363년에 지진이 일어나서 도시의 많은 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동로마제국이 지배를 할 때 이 곳에 교회들을 지었고 상업을 활성화시켰지만 서기 551년에 지진으로 더 광범위하게 파괴되었다. 7세기 아랍이 침공했을 때 도시들은 이미 오래전에 버려져 있었고 나바테아 인들은 잊혀졌다.

19세기에 유럽 탐험가들이 이곳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페트라를 통해서 나바테안 문화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많은 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방문하여 고대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페트라는 1985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되었다.
2007년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선전되었다.

페트라에서 남아있는 엄청난 구조물들은 나바테아 인들의 석공 기술이 고대 세계에 비길 데 없었다.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은 이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왕국이 될 수 있게 해 주었다. 비록 수세기 동안 잊혔었지만, 나바테아 인들은 오늘날 이 지역의 혹독한 기후를 견뎌낸 것은 물론이고 그 속에서 번영할 수 있었던 고도로 발달된 문화로 인정받고 있다.

나바테아 문명의 흔적을 보려면 요르단은 물론이고 이스라엘, 시리아 그리고 사우디 아라비아를 봐야 된다. 특히 사우디 아라비아의 알-울라(Al-ula)는 나바테아 문화의 흔적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며 사막-산악 경관이 기막힌 곳이다.

2019년 9월 28일부터 사우디는 한국을 비롯한 49개국 만을 위한 관광비자를 받을 수 있게 했다. 사전에 전자비자를 신청해도 되고 도착해서 비자를 받아도 된다. 
사우디 아라비아 전자비자 신청 사이트 (https://visa.visitsaudi.com/ 현재는 사이트 보수 중)
은둔의 왕국 사우디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기대가 된다. 

사우디-800년 전에 만들어진 알울라 구시가지. 수세기 동안 여행객들을 맞았던 곳. 
사우디-알울라에 새워진 마라야 콘서어트 홀. 겨울에 음악제가 열린다.
사우디-알룰라 벌룰
사우디-알울라 자연경관
사우디-알울라. 구시가지와 자연경관
사우디-알울라 지역
사우디-암각화가 가득한 바위. 
사우디-하늘로 향하는 계단
사우디-알울라 코끼리 바위
사우디-알울라 사막 사파리
사우디-알울라 전망대
사우디-국립공원 알 하발라(Al-Habala) 산악경관
사우디 아라비아 홍해 
홍해의 신부 제다(Jeddah) 구시가지
개방된 현대식 도시 제다(Jeddah) 구시가지
메카의 관문 제다(Jeddah) 구시가지

2019년 9월 27일 사우디의 무하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사우디의 마음과 문을 엽니다."라는 주제로 문호 개방을 알렸다. 탈석유 시대를 준비하는 사우디는 거대 프로젝트로 이슬람 율법에서 자유로운 호텔, 쇼핑, 리조트, 위락시설을 만들기 위해서 캐나다 트리플5, 아랍에미레이트의 마지드 알프타임, 인도 OYO, 사우디 항공 등 31조 상당의 양해각서를 맺고 투자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2030년까지 10년간 15억 명의 승객을 수용하는 국제공항을 건설하고 객실 50만 개과 일자리 100만 개를 새로 마련한다는 원대한 포부도 밝혔다. 

사우디 홍보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