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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은 상징을 찾아가는 인문학이다
터키

수학자와 물리학자가 6년 만에 만든 하기아(아야) 소피아.

by 두루가이드 2019. 11. 13.

<하늘에 떠있는 돔>

소피아는 그리스어로 성스러운 지혜라는 의미이다.
정말 지혜가 가득했는지 당대 최대 건물을 불과 6년만(532-537)에 완공했다.
이 건물을 3번째 하기아 소피아이다.
이전에 있었던 불타버린 하기아 소피아 위에 다시 만들었다.

높이가 55미터로 속이 텅 비어있는 20층 높이 건물과 같다.
중앙에 있는 돔은 지름이 31미터로 로마에 있는 판테온보다 작다. 그러나 훨씬 높은 곳에 있다.
신비한 공간에 대해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 돔이 땅에서 올라간 것이 아니라 황금 사슬로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 마치 하늘이 성당을 덮은 것처럼 보인다."라고 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보이지는 않지만 당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일이었다.
기둥 없는 거대한 공간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 건물을 만든 사람들은 건축가가 아니었다. 
트랄레스의 수학자 안테미오스와 
밀레투스의 물리학자인 이시도르스의 합작품이다. 
로마 법전을 만든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두 학자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다고 한다.
크기가 클 것 그리고 독창적일 것.
상당히 어려운 주문이었던 것이다.

하늘에는 원형의 돔(사실 타원에 가까운)이 있고 땅에는 직사각형의 구조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정하다)의 구조를 하고 있다. 이 천원지방은 우리의 오래된 문화상징이지만 서양에서도 그리스도교 이전과 그 이후에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문화상징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구조로 만들었다. 
직사각형을 구조는 입구에서 들어오면 시선이 바로 주제단을 향하기 때문에 제단을 강조한 구조이다.

세월이 흘러서 성당을 가득히 장식했던 모자이크는 많이 훼손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수호성인은 성모 마리아였다.
남아 있는 모자이크 중에서 들어오는 입구 쪽에 성모 마리아 양쪽에 유스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가 그려져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노플 성을 들고 있고 유스티아누스는 소피아 성당을 들고 있다.
유스티아누스는 하기아 소피아를 만들고 나서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소."라고 했다.  

10세기 모자이크. 가운데 콘스탄티누스의 수호신 성모마리아. 좌측에 소피아 성당을 들고 있는 유스티아누스, 우측에 콘스탄티노플을 들고 있는 콘스탄티누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나서 오스만의 젊은 정복왕 메메드 2세는 이 성당이 마음에 들어서 바로 모스크로 바꿨다고 한다.
그리고 모자이크 위에 회칠을 해서 아랍어로 쓴 서예판을 달았다.
900년간 성당이었다가 500년 동안은 이슬람 모스크였다. 
이슬람인들의 특징상 타 종교에 대해서 그렇게 가옥 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칠을 벗겨 내서 비잔틴 모자이크를 볼 수 있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살펴보면 새롭게 재료를 구해다 만든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던 곳의 건물에서 뜯어온 재료들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들어가는 입구 문을 보면 성당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구조적으로 문의 크기에 건물 끼워 맞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색이 있는 대리석들을 지중해 여기저기서 가져다 다듬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황제가 들어오는 청동문-Nice Door라는 불리는 상징이 가득한 이 문은 이미 기원전 2세기에 만들어졌다. 2200년전에 만들어진 문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많이 접했던 만(卍)자가 가득새겨져 있다. 그리스 문화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만자는 유럽에서는 7천년 전부터 존재해 오고 있다.


그리스 시대부터 존재했던 건물들은 좋은 채석장이 되기 마련이기 때문에 재료를 빨리 구하기 위해서 오래된 건물에서 가져왔다. 중세에 들어와서 로마시대 건축물들이 좋은 재료가 되는 운명을 맞이 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본질은 미트라교 성전**

그런데 최초의 그리스도 성당 하기아 소피아는 건물이 놓인 방향이 전통적인 기독교 성당이 놓이는 방향과는 다르다.
그러니까 주제단이 향하는 방향은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야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제단은 동남쪽 방향으로 33도 기울어져 있다.
이는 동지 때 해가 뜨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하기아 소피아의 주제단이 향하는 방향이 동남쪽으로 33도 틀어져서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서양의 많은 기독교 성당들은 주제단이 향하는 방향이 정동쪽을 향하고 있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카톨릭 성당의 어머니로 가장 서열이 높은 로마의 산 조반니 인 라데라노 대성당은 서남쪽,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은 서쪽, 파리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과 비엔나의 슈테판 대성당은 동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몽마르트 언덕에 있는 사원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

유스티아누스는 그의 부인 테오도라와 함께 기독교가 아닌 미트라 신앙을 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유행했던 동방의 신들은 미트라, 이집트의 세라피스( Serapis명계의 신), 이아오-아브락사스(Iao-Abraxas).
미트라 신앙은 기독교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세례성사, 성만찬, 예배 시 동쪽을 향하는 것, 해의 날을 성화하며, 동짓날을 구세주가 태어난 날로 전하는 것 등이 미트라 숭배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미트라 신앙은 점차 기독교와 혼합되어 그 명칭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본질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심지어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도 구리 동전 뒷면에 "수호신, 정복할 수 없는 태양신께(SOLI INVICTO COMIT)"라는 문구를 새겼다. 유스티아누스는 죽을 때까지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미트라 신앙을 했다. 
당시 사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인정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우월적인 미트라 신앙이 지속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독교라는 종교는 당시 이교도들의 다양한 풍습을 차용한 종교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