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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페스트 방역실패가 부른 참사-마르세유

by 두루가이드 2020. 3. 31.

샤토디프-IF 섬과 검역소가 있었던 프리오유 섬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IF 섬>과 <페스트>

남프랑스의 대표적인 도시 중에 마르세유가 있다.
자주 여행갔던 나에겐 매우 익숙한 도시이다.
프랑스에서는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파리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아주 오래전 페니키아 인들이 들어와서 도시를 만들었을 때 '마살리아'로 불렀다.
마살리아가 마르세유가 되었다. 그 후 로마인들이 들어와서 살았다.

기독교 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로 막달라 마리아가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이다.
프랑스에서 커피가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혁명 때 혁명정부를 지지하는 마르세유 사람 500명이 파리까지 행진하면서 불렀던 노래 '라 마르세이예(La Marseillaise)'가 현재 프랑스 국가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마르세유는 외국인들이 더 많이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곳이다.
인구의 1/3은 북아프리카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에서 온 베르베르인들이 살고 있어서 아랍의 수도라는 별명도 있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초 파시즘을 피해서 넘어온 사람들,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 동유럽인들이 대거 넘어와서 살고 있는 곳이다.  
북아프리카의 가난한 이민자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범죄가 끊이지 않는 악명 높은 곳이어서 관광객들에겐 그다지 환영받는 곳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에게 마르세유는 지중해의 역사가 풍부한 곳이어서 이민족들의 역사까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도시 앞바다에는 요새가 새워진 작은 섬이 있다. 
IF섬으로 알려진 샤토 디프(Château d'if) 섬이다. IF라는 의미는 Rock을 뜻한다. 낚시나 하면 딱 좋을 암반으로 되어 있는 섬이었다.
16세기 프랑스의 씩씩한 왕 '프랑스와 1세'는 돈이 들어오는 마르세유를 차지하고 나서 마르세유 사람들이 배를 타고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게 군사 요새를 새워서 대포를 설치했던 곳이다. 사실상 대포의 사거리가 400미터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쓸모없었던 곳이었다. 대포의 사거리를 벗어나서 배를 움직이면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곳이 능력을 시험해볼 기회가 있긴 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낳은 스페인의 카를 5세가 마르세유로 쳐들어 오려고 했을 때 써먹어 보려 했었다. 그런데 오지 않았다.
이후 IF섬은 정치인들 감옥으로 사용을 했는데 영국인들이 찾아와서 나쁜 곳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소설의 소재로도 등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대문호 알렉 상트르 뒤마의 소설 <몽테크리스토의 백작>의 배경이 되었다.
그 섬으로 가는 배의 이름 도 몽테크리스토 백작 속 주인공인 에드몽 당테스이다. 
알렉 상트르 뒤마는 <여왕 마고>, <삼총사>, <철가면> 등으로도 유명하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배경이 되었던 샤토 디프(Château d'If)

이프 섬에 대한 환상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내용처럼 진짜 지독하게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어 나갔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사실은 불편한 호텔 같은 역할을 했다. 돈이 있으면 술도 마실수 있었고 맛난 음식도 먹을 수 있었다. 심지어는 여자도 부를 수 있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군사요새로 만들었기 때문에 장교가 있었던 수감 방은 벽난로도 있다.

IF섬에서 본 마르세유
IF섬
IF 섬 요새 / 인도에서 가져온 유럽 최초의 코뿔소. 인도에서 교황청으로가던 중간에 IF섬에 잠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풀었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그림

현재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인해서 생각하는 역사적인 사실이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유럽엔 약 600번의 천연두가 있었고, 여러 차례 페스트가 지나갔다.
그중 1720년 마르세유 페스트는 프랑스 마지막 페스트였지만 유럽 최악의 사례 중에 하나로 방역 실패로 인한 참담한 죽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당시 페스트로 인해서 마르세유를 포함한 프로방스 및 기타 지역 등 195,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략 지역에 따라 25%-50%의 치사율을 가지고 있었다.

1720년 페스트로 항구에 널려진 시신들  
1998년 발굴한 유골


사건의 시작은 1720 년 4월 선장 장-밥티스트 샤토(Jean-Baptiste Chataud)가 범선 그랑 생 앙투안(Grand Saint-Antoine)을 이끌고 시리아에서 귀중한 직물들을 실었을 때부터였다. 배에는 900가지의 귀중한 직물들로 가득했고 그 값어치는 당시 노동자의 100,000명의 월급에 해당하는 1000,000 ECU였다. 당시 노동자 평균 월급은 1 ECU였다.
시리아를 출발한 배는 레바논의 시돈과 트리폴리를 경유해서 전염병이 퍼져있었던 사이프러스를 경유했다. 이 과정에서 터키인 승객이 이틀 만에 죽었고 며칠 후 몇몇 선원과 외과 의사가 죽었다. 이탈리아에 왔을 때 피사 아래쪽에 있는 항구 리보르노 입항이 거절되었다. 배에 있는 귀중한 900가지의 직물이 페스트를 가진 벼룩으로 오염된 상태였다. 

범선 그랑 생 앙투안 / 선장 장 밥티스트 샤토


1720년 5월 25일 그랑 생 앙투안이 마르세유로 들어왔다.
당시는 부자 상인들이 뽑은 4명의 행정과들이 도시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이미 심각한 질병에 오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물건에 대한 욕심 때문에 화물의 주인들이었던 부자 상인들은 의원회와 내통해서 배를 정박시키고 물건을 내렸다. 
그 순간부터 페스트가 퍼져나갔고 순식간에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9월 26일 문제의 배는 위원회에 의해서 태워지고 침몰시켰다.
선장 장 밥티스트 샤토는 가까운 IF섬에 감금이 되어 3년간 복역했다.


도시들을 페스트 확산을 막으려는 노력으로 마을마다 페스트 방벽을 설치했고 도시 간에 교류를 했을 때 사형에 쳐해 졌다.

 도시마다 설치한 페스트 벽 -mur de la peste (plague wall)

여기까지는 정설로 안려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마르세유에 페스트가 퍼진 이유에 대해서 전해지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랑 생 앙투안의 선원들과 선장 장 밥티스트 샤토는 마르세유에 들어오자마자 일단 인근 섬의 검역소에 격리가 되었다. 그런데 선장은 신분을 생각해서 혼자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을 제공받았는데 바로 불편한 호텔과 같은 샤토 디프 섬이었다. 그런데 며칠 잘지내던 선장은 답답함을 못 이겨서 배를 타고 마르세유 항구로 들어가서 유흥을 즐겼다고 한다. 이 때문에 페스트가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마 샤토디프 섬의 엉터리 감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프랑스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처럼 들리긴 한다.

 

<마르세유 검역 시스템>

1580년의 페스트 말기에 마르세유 사람들은 미래의 질병 확산을 통제하기 위한 극적인 조치를 취했다. 마르세유 시의회는 위생 위원회를 설치했는데, 그 위원들은 의회 의원들과 의사들로 구성되었다. 이는 마르세유 시가 조직한 최초의 행정기관이기도 했다. 마치 우리의 질병관리본부 비슷한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이후 새롭게 설립된 위생 위원회는 도시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일련의 권고안을 만들었다.

위생위원회는 외부 전염병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는 것 외에 공공 기반시설인 마르세유 최초의 공립병원을 건설했다.  의사와 간호사로 구성된 정식 직원도 뽑았다. 게다가, 위생 위원회는 지역 의사들의 인가를 담당했다. 전염병 기간 중에 퍼졌던 잘못된 많은 정보들을 걸러냈고 위생 위원회는 최소한 시민들에게 믿을 만한 의사들의 목록을 제공했다.

위생위원회는 3단계의 통제와 격리 시스템을 구축했다. 위원회는 들어오는 모든 배들을 검사하고 선원들에게 세 개의 "건강 증명서" 중 하나를 주었다. 작성된 "건강 증명서"는 배와 화물이 도시에 접근의 유무를 결정했다.
위생위원회의 대표단은 배가 정박했던 모든 도시를 기록한 선장의 일지를 검토하고, 최근 페스트 사건이 있었다는 소문이 있는 지중해 전역의 도시의 명단과 대조했다. 대표단은 또 모든 화물과 승무원, 승객들을 검사해 질병의 징후를 찾아냈다. 만약 질병의 징후를 찾았다면, 그 배는 마르세유 항구에 정박할 수 없었다.

배가 첫 번째 테스트를 통과했고 질병의 징후가 없더라도, 배의 항해일정에 페스트 활동이 기록된 도시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배는 마르세유 항구 외곽의 섬들에 있는 두 번째 격리구역으로 보내졌다. 검역소의 기준은 질병에 감염된 공기를 환기시키기 위함이며, 연락하기 쉽게 항구 근처에 만들었고, 더러운 물을 배출해서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선박에 대한 깨끗한 건강증명서조차 섬 밖에서의 최소 18일의 격리를 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승무원들은 도시 주변에 건설된 검역소에서 지내야 된다. 검역소 또한 배와 개인에게 주어진 건강증명서에 따라 분류되었다. 깨끗한 건강 증명서를 가진 선원은 가장 큰 검역소로 보냈다. 그곳은 한 번에 많은 배와 선원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숙소와 가게들이 있었다.
선원들이 페스트에 감염이 되었다고 확신이 들면 그들은 마르세유 항구 밖에 있는 섬에 있는 더 고립된 격리소에 보내졌다. 선원과 승객들은 페스트의 징후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50일에서 60일 동안 그곳에서 기다려야 했다.

일단 그 기간이 지나면, 격리되었던 사람들은 도시로 들어가서 물건을 팔 수 있었고 출발 전까지 즐길 수 있었다.

마르세유 중세지도
18세기 마르세유 항구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