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막시밀리언 1세 500주년

두루가이드 2019. 3. 12. 00:50


<남들은 전쟁하게 나둬라.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Bella Gerant Alii - Tu Felix Austria nube! (Let others wage war, but thou, Happy Austria, marry!)

(정밀한 그림으로 유명했던 독일을 대표하는 르네상스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막시밀리언 1세. 그림 속에서 황제를 상징하는 것은 좌측 위에 있는 쌍두 독수리와 왕관 그리고 황금양털 기사단의 팬던트뿐이다. )

2019년은 합스브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가 세계를 제패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황제 막시밀리언 1세(1459-1519)의 서거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막시밀리언 1세의 도시였던 인스부르크는 막시밀리언 마케팅이 한창이다. 반면에 역사적으로 오스트리아와 사이가 매우 안 좋았던 프랑스에선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서거 500주년 행사에 여념이 없다.
막시밀리언 1세부터 시작해서 스페인 합스브르크 왕실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하려한다.

(인스부르크 중심 황금지붕. 막시밀리언 거처로 사용했던 옛궁전)


(마리아테레지아 거리에서 본 인스루르크. 성 안나의 기둥 뒤로 노르드케테<북쪽의 쇠사슬>이라는 산이 인상적인 곳이다.)


오스트리아는 문화유산이 매우 풍요롭기 때문에 매년 특집으로 내세울 만한 인물이 많다.
그 중에 막시밀리언 1세의 결혼정책은 오스트리아를 유럽에서 가장 풍족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었다. 왕실끼리 결혼을 하면서 누가 먼저 죽으면 살아 있는 쪽이 상속하는 룰인 상호상속제를 만들어서 영토를 넓혀왔기 때문이다. 합스브르크 집안 사람이 결혼 상대자 보다 오래사는 행운이 따랐기에 결혼한 이후에 영토가 넓어졌다. 지속적인 결혼정책은 18세기 마리아테레지아 시대에 와서 정점을 찍었다.


(합스부르크 640년 동안 이름을 날렸던 중요 인물들.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비롯해서 20명의 황제가 나왔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 비엔나 샤츠캄머(보물창고)에 보관 중인 중세를 대표하는 상징물. "카를 대제가 처음 쓰고 나서 역대 신성로마황제는 이 관을 썼다."고 되어 있지만 이 관은 카를대제가 죽은 뒤 백년이 지나서야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막시밀리언이 전쟁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는 40년 동안 약 25번의 전쟁을 했다.
막시밀리언은 빈 소년 합창단의 전신인 왕실 합창단을 만들었으며, 부르고뉴(부르군트) 지역을 합치면서 황금양털 기사단장 되었다.
이후 합스브르크 황제는 누구든지 가입하고 싶었던
유럽 최고의 엘리트 클럽 황금양털 기사단을 이끌어갔다.

사실 막시밀리언에게 큰 장벽은 그의 아버지였다. 막시밀리언의 아버지 프레데릭 3세(Frederick 3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길~게(53년간) 했지만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최악의 평을 받은 인물이었다.  게으르고 무능해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스만 튀르크가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풀을 점령했을 때도 유일하게 놀라지 않았던 사람이다. 카톨릭을 수호해야 되는 황제였음에도 "뭐 어쩌라고?"했을 듯하다. 
그가 가진 유일한 재주라고는 오래 사는 것이었다. "오래 살다 보니 신(神)께서 적들을 다 죽였다."였다. 


(게으름뱅이 프레데렉 3세)

프레데릭3세의 동생 알브레히트 6세는 멍청한 형의 황제자리를 탐내서 형을 두둘겨 패기도(전쟁) 했다. 그러나 동생은 곧 죽었다. 헝가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 중에 한 명인 마티아스 코르비누스 훈야디는 보헤미아의 왕이기도 했는데 그의 야심은 오스트리아도 합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일부는 차지하고 프레데릭 3세를 비엔나 밖으로 쫓아냈다. 그러나 코르비누스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결국 뺏겼던 땅은 다시 프레데릭 3세의 영토가 되었다. 그 밖에 다양한 사건이 있었지만 그냥 계속 오래 견뎠다. 한 것이 있다면 죽기 전에 선제후 7명으로 하여금 자신의 큰 아들 막시밀리언을 미리 차기 황제로 선출해 놓았고 오스트리아 곳곳에 <A.E.I.O.U.>라는 인이셜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보다 천문학과 점성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린츠(Linz) 성에 천문관측소를 만들기도 했고 수학과 광물학, 마술, 신비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마법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었는지 주술같은 AEIOU를 남겼다. 후대에게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숙제를 남겨놓고 말이다. 현재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아버지가 죽은 해(1493)에 막시밀리언은 로마의 왕이 되었다. 로마에 가서 대관식을 해야 하는데 베네치아 인들이 자신들의 땅을 밟고 가지 못하게 해서 로마로 갈 수 없었다. 베네치아는 다른 국가들에게 매우 크나큰 위협이 되었다. 이후 베네치아를 상대로 이탈리아에서 긴 전쟁이 있었다. 막시밀리언은1508년에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로 가지 않고 교황없이 스스로 신성로마황제에 올랐다. 황제가 되는데 사실상 교황이 필요하지 않게 되자 막시밀리언은 1512년 쾰른 제국 회의 때 "독일국민의 신성로마제국"이라 공식 국명을 사용했다. 이탈리아도 거의 상실했고 프랑스 와도 적대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이웃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선을 그었다. 그리니까 신성로마제국은 독일민족이 로마제국을 지배했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기사 갑옷을 입은 막시밀리언 1세)

그의 별명은 "마지막 기사(The Last Knight)" 였다. 당시 전쟁은 말에서 내려서 싸우는 보병전이 대세였다. 보병으로 싸운 적이 없는 용병들을 보병훈련을 시키고 전쟁터에 내보냈다. 그러면서도 막시밀리언 자신은 마상 창시합을 너무 좋아해서 그를 마지막 기사라고 불렀다.

사실 막시밀리언은 무능했던 아버지 때문에 정치를 잘 할 수 없었지만 영민해서 사람을 잘 썼다. 인사가 만사라 하지 않았던가. 그는 사람을 잘 고용했다.
그러나 그 어떤 무엇보다 막시밀리언 최고의 행운은 결혼을 잘 한 것이었다. 결혼정책으로 영토를 넓혔고
부자가 되었고 정치적인 힘이 커졌다. 그래서 다른 제후들로부터 질투가 담긴 험담이었던 "남들이 전쟁을 하던지 말던지 우린 행복한 결혼을 하겠다."라는 말이 합스브르크의 모토(좌우명)가 되었다. 

첫번째 결혼은 부르군트(부르고뉴)
의 마리(Maria)였다. 그녀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상속녀였다. 그녀의 상속재산은 부르군트 공국뿐 아니라 네덜란드(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도 포함 되어 있었다.


(막시밀리언의 결혼정책을 상징하는 유명한 그림. 위에서부터 좌측부터 막시밀리언, 스페인 왕이 된 아들 미남왕 필립, 막대한 부를 가져다 준 막시밀리언의 아내 부르군트의 마리. 아래는 좌측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카를 5세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 유럽과 중남미를 차지해서 해가지지 않은 제국을 가진 카를 5세,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이었던 사위 루드비히 야기엘로)

부르군트 영주는 프랑스 왕실의 가신이었다. 프랑스 신하의 딸과 제국의 황태자와의 결혼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부르군트는 모직 생산을 하며 크게 성장해서 독립국이나 다름이 없었다. 프랑스 동쪽과 북쪽에서 프랑스를 감싸는 모양의 땅이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매우 위협을 느껴서 오스트리아를 싫어하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합스브르크와 여러차례 전쟁을 하게 되었다.  막시밀리인 시대의 대표적인 전쟁은 영국의 헨리8세와 연합해서 프랑스 북부에서 중요한 승리를 한 경우였다. 이 전쟁으로 인해서 프랑스는 북쪽을 넘보지 못했다.

 
(부르군트 공작령)

프랑스는 30년 종교 전쟁 때 로마 카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 편에 서지도 않았으며, 이슬람국가인 오스만 튀르크가 비엔나를 포위했을 때도 튀르크의 편을 들었다. 프랑스는 자신들이 매우 불리했던 7년 전쟁(프러시아와 전쟁. 1756-1763) 이전까지 오스트리아한 번도 손을 잡아본 적이 없다.

전통적으로 부르군트의 공작은 유럽 최고 엘리트들이 모인다는 황금양털기사단장을 역임했다. 부르군트의 공작 선량공 필립(Philip the Good : 1396-1467)이 만든 황금양털 기사단(Order of the Golden Fleece)은 동쪽에 대한 부러움에서 시작되었다. 지중해 동쪽은 로마시대부터 서쪽보다 항상 잘 살았다. 중국 쪽에서 오는 실크와 아랍권의 진기한 물건들, 십자군들이 들려주는 신기한 이야기, 베네치아가 동방무역을 독점하면서 벌어들이는 막대한 부 등을 통해서 부러운 동쪽처럼 되려는 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선량공 필립은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이아손이 그의 친구 헤라클래스 등 여럿과 함께 아르곤 호를 타고 흑해 동쪽에 가서 황금양털을 훔쳐와서 나라를 구하고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황금양털 기사단이다.



(아르곤 호를 타고 흑해 동쪽으로 간 이아손이 황금양털을 가져와 나라를 구한다는 그리이스 신화)


(현존하는 황금양털 기사단의 팬던트)

세월이 흘러 막시밀리언 1세가 부르군트의 마리와 결혼하면서 황금양털기사단장이 되었다. 당시 귀족이라면 누구나 가입하기를 열망했던 기사단은 처음 24명이었다. 나중에 70명까지 되었다. 현존하는 기사단원은 51명이다. 스페인 라인과 오스트리아 라인이 존재하며 정통성은 오스트리아가 가지고 있다. 


(비엔나 왕궁(호프부르크)의 샤츠캄머(보물창고)에 전시되어 있는 황금양털 기사단들의 문장과 팬턴트. 황금양털 기사단으로보터 위임받아 보관 전시하고 있다.)

막시밀리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성공은 부르군트의 마리와의 결혼만이 아니었다. 그의 아들 미남왕 필립이 스페인 공주 "미친녀자" 후아나와의 결혼은 합스부르크의 영토가 해가지지 않는 곳이 되게 했다. 상호상속을 하는 규칙에 따라 스페인 합스브르크 집안은 남미의 아즈텍과 잉카를 비롯한 여러 지역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정책은 다음 세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디난트 2세의 자녀 (미친녀자)후아나와 아라곤의 요한이 각각 막시밀리언 미남 필립과 마르가레테와 겹사돈을 맺었다.) 

막시밀리언의 손자(미남왕 필립의 아들) 페르디난트 1세는 헝가리 및 보헤미아(체코)의 야기엘론 왕가의 안나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의 딸 마리아는 헝가리 및 보헤미아의 왕 루드비히 2세와 결혼을 해서 겹사돈 관계를 맺었다. 이 번에도 행운이 따랐다. 루드비히가 1526년 헝가리의 모하치에서 오스만 튀르크와 전투를 하다 전사를 하자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영토가 합스브르크에 들어온 것이다. 현재 헝가리 남쪽 다뉴브 강이 흐르는 도시 모하치에서 벌어진 모하치 전투는 오스만 튀르크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후 오스만 튀르크는 비엔나를 두 번이나 포위를 하기도 했다.

(미남왕 필립의 자녀 중 페르디난트 1세와 마리아는 각각  헝가리 및 보헤미아의 안나 그리고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 루드비히 2세와 결혼했다. 역시 이중결혼을 했다.) 

막시밀리언 입장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손자라면 아무래도 미남 왕 필립의 아들 카를5세이다. 그는 아버지가 일찍 죽고 나서 어린나이에 스페인 왕으로서 카를 1세가 되고 신대륙의 영토까지 차지했다. 할아버지가 막시밀리언 1세가 죽고 나서 천문학 적인 돈을 쓰면서 치열한 선거전 끝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5세가 되었다. 즉, 친할아버지 막시밀리언1세에게 엄청나게 방대한 자산을 물려받았고 외할아버지로부터 스페인과 새롭게 개척한 아메리카 땅까지 물려받았다. 소위 해가지지 않는 가문이자 해가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카를5세 때부터 시작된 이야기이다.


(신성로마 황제로 등극 후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던 카를 5세)


( 카를 5세의 유럽 영토. 붉은 선 안쪽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할 지역이었다. 북아프리카 알제리, 모로코와 발칸반도는 오스만 튀르크가 차지하고 있어서 매우 큰 위협이었다.)

 

카를 5세가 황제의 선거를 치를 때 경쟁자였던 인물은 프랑스의 왕 프랑소와 1세였다. 프랑소와 1세는 카를 5세의 매형이었지만 황제가 되려는 야욕에 차 있었다. 프랑소와 1세의 입장에선 '독일도 지배하지 못하는 독일 왕이 황제가 된다는 것은 코메디 같은 소리'였다. 그래서 독일과 전혀 무관한 프랑소와가 입후보를 했으며 프랑스 경제가 좋아져서 돈도 좀 있었다. 카를과 프랑소와는 엄청나게 돈을 쏟아부으면서 당대 최악의 금권선거를 치렀다.


(당대 최고 부자 야콥 푸거. 독일 르네상스의 대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

 카를은 당대 유럽 최고 부자였던 다국적 기업을 운영하던 아우구스부르크의 푸거(Fugger)가문(합스부르크의 금고라 칭했던)에게 돈을 빌렸다. 그리고 금 2톤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써서 선재후들을 매수해서 황제가 되었다. 이 금권선거로 인해서 훗날 루터의 종교개혁을 알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프랑스와 1세도 돈을 엄청 썼지만 결국 패했기 때문에 화가 날 때로 났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매료되어 술에 관심이 많았던 프랑소와 1세. 그가 선언한 최고의 적은 카를 5세였다.)

이 때문에 프랑소와 1세는 자신의 최고의 적은 카를5세라 선포하고 카를5세와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프랑소와는 이탈리아 파비아에서 카를과 전투를 하다  포로로 잡혔다. 카를은 여러가지 조건을 달고 풀어주었다. 의욕은 많았지만 그리 똑똑하지 못했던 프랑소와 1세는 프랑스로 돌아간 후 카를과의 약속을 깨고 이번엔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과 손을 잡고 바다에서 합스부르크와 전쟁을 하기도 했다. 



(루아르 계곡 고성들 중 가장 아름답다는 샹보르 성. 다빈치가 설계에 참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프랑소와 1세는
 예술과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밀라노로 원정가서 전쟁을 할 때 다빈치의 작품에 매료되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초청해서 루아르 강변의 앙부아즈 성에 살 곳을 마련해주고 그와 은밀한 대화를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푹 빠진 프랑소와 1세는 다빈치의 힘을 빌려서 루아르 고성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샹보르 성을 설계하게 했다. 다빈치는 1519년 자신의 역작인 모나리자를 걸었던 앙브아즈 성에서 생을 마감했다.)

19살에 황제에 올라 30년간 제위를 한 카를5세는 40번의 전쟁을 치르면서 매우 지쳤다. 오스만 튀르크와 전쟁을 하랴, 프랑스와 전쟁을 하랴, 이탈리아를 장악하기 위한 전쟁을 하랴, 독일에서 프로테스탄트들가 전쟁을 하랴.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에 관한 95개 조항을 발표하며 독일에 지진을 일으켰다. 소위 프로테스탄트들과의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이겼지만 너무 가혹했던 카를5세는 부하의 배신으로 인해서 인스부르크까지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동생 페르디난트가 중간에 없었으면 아주 피곤할뻔 했다.
너무 지친 그는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고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을 넘겨주고, 동생 페르디난트에겐 신성로마제국황제의 자리는 넘겼다. 그리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쉬다가 2년 후 지독한 말라리아로 인해 58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펠리페 2세. 지독한 로마카톨릭 수호자여서 프로테스탄트에게 매우 가혹했다. 제국이 빛에 쪼들리자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서 모든 일을 했다.)

(펠리페 2세가 만든 마드리드 인근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이나 다름 없는 궁전에서 수도사와 같은 복장으로 부지런히 일을했다.)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의 왕 펠리페 1세 이기도 했다. 포르투갈의 왕 주왕3세는 후계자 없이 죽었다. 주왕3세와 같은 항렬에 있었던 사람은 펠리페 2세의 어머니 이사벨이었다. 당연히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국왕 후보자가 되었다. 특히 포르투갈 귀족들은 부자나라 스페인과 합치고 싶어했다. 뭔가 얻어먹을 것이 많은 나라였으니 말이다. 펠리페 2세는 포루투갈 왕 펠리페 1세도 겸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그 누구도 가져보지 못한 아시아의 여러 곳과 스페인이 차지한 중남미까지 명실공히 해가지지 않은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무적함대 아르마다의 왕이기도 했다. 오스만 튀르크 함대를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튀르크의 힘을 빼게 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물론 이 사건 이후로 지중해는 해적들이 판을 치는 곳이 되어 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까지 하게 되자 명실공히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되었다. 스페인의 중남미와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아시아를 다 가지게 되었고 이를 기념해서 자신의 이름을 딴 나라로 가장 동쪽에 있는 땅을 '필리핀'이라 했다.)

(스페인 무적함대 아르마다. 지중해를 호령하고 중남미에서 금과 은을 실은 스페인 배를 안전하게 호위하던 함선. 그러나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과의 전투에서 치밀한 영국에게 패하고 말았다.)

스페인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모습이었지만 아버지 카를 5세가 평생 전쟁을 하면서 남긴 막대한 빚을 청산하지 못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서 파리까지 단숨에 정복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 결국 파산선고를 했다. 펠리페 2세 때도 많은 전쟁을 하면서 국고가 탕진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영국, 프랑스, 이슬람 등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펠리페 2세는 병적으로 프로테스탄트를 경멸했고 종교 재판소를 설치했으며 마녀사냥을 했다. 그는 또 영국의 여왕 메리1세와 결혼을 했다. 메리는 아버지 헨리 8세가 영국을 성공회 나라로 만든 것을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돌려 놓으려 했다. 500명의 신교 지도자가 추방당했고, 280명이 회형 당했다.
족보상으로 메리 1세는 카를 5세의 사촌 여동생이며 펠리페 2세의 고모이다. 펠리페 2세보다 11살이나 많았다. 

 합스브르크는 많은 이들을 공격했고 또 그들 로부터 방어를 해야 했기 때문에 막강한 스페인 군대도 여러곳에서 전쟁을 해야 했기 때문에 힘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수렁에 빠진 덩치 큰 곰이었다. 사냥개들보다 힘이 월등했지만 혼자서 덤벼드는 개들을 다 막을 수는 없어서 서서히 지쳐갔다. 스페인은 중남미에서 들어오는 은과 금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빚을 갚고 나면 남은 것은 매우 적었다. 그 금들로 인해서 유럽이 발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하여간 스페인은 4차례에 걸친 국가파산 선고를 내리기도 했다. 
스페인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고 결국 2류 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고 두 세대가 지난 후 스페인 합스브르크는 대가 사라졌다. 한편 오스트리아 합스브르크는 마리아테레지아의 아버지 카를 6세 때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자 프랑스 동쪽 로트링겐(로레인) 가문의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해서 이어져 내려갔다. 이 때부터 합스부르크는 주걱턱이 있는 사람이 사라지고 가문의 이름도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란 이름을 쓰면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까지 이어져 갔다.  

(인스브르크 중심 왕궁성당(검은성당)에 있는 막시밀리언 1세의 가묘. 그 묘를 호위 하듯이 서 있는 실물크기의 합스부르크 조상들의 청동상과 유럽을 대표하는 왕들의 청동상. 유럽 최고의 르네상스 동상들이며 매우 섬세하고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상징들이 가득하다.)

 
(마드리드 인근 왕궁 엘 에스코리얼 대성당 내부에 있는 카를 5세와 그의 부인 포르투갈의 이사벨라)


(마드리드 인근 왕궁 엘 에스코리얼 대성당 내부에 있는 펠리페 2세와 그의 3명의 부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