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 조랑말, 맛있는 대구포가 있는 바이킹의 나라 아이슬란드
<이상한 바이킹의 나라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를 특징 짖는 가장 강력한 한 방은 얼음과 불의 나라답게 빙하와 화산이다.
그러나 나에게 아이슬란드 하면 자연경관은 기본이고 맛있는 대구포와 조랑말 그리고 가죽으로 만든 샅바 씨름이다.
거기에다 전승된 이야기 사가(SAGA: 이야기로 전해져 온 역사를 기록한 책)에 따르면 용(龍) 선을 타고 온 바이킹 리더의 복식은 머리에 깃털이 두 개 꽂혀 있는 일종의 절풍을 썼고 첫 정착지에는 마치 기마민족들이 세웠던 솟대와 같은 신성한 기둥을 세우고 마을을 만들었다는 점이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들이다.
이런 나무의 원형은 몽골 초원 지역에 많았던 사슴돌이 원형으로 유럽 쪽으로 오면서 나무 기둥으로 변했다. 특히 헝가리 모하치에 많이 남아 있다.
우리는 바이킹 하면 약탈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바이킹이 약탈을 했던 기간은 불과 300년도 안된다.
바이킹에 대한 어원은 논란이 많지만 흔히 피요르드 작은 만에 사는 사람들을 뜻한다고 알려져 있다.
viking(여성명사)에서 vik는 작은 만, 입구를 의미한다. 여러 가지 이론이 있지만 노르웨이의 역사적인 지역인 비켄(viken) 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뜻하는 것으로도 본다. 그러나 여기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한다. 비켄 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바이킹이라 부르지 않았고 비크베리르(vikverir: 비크 거주자)라 불렀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명사인 viking이 아닌 남성 명사인 vikingr로만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남성성은 여성성에서 쉽게 파생되지만 이 경우는 파생되었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viking의 어원의 또 다른 이론으로는 고대 노르드 언어인 vika(비카. 여성명사)에서 온 것으로 본다. 이 의미는 'the distance between two shifts of rowers(2교대로 노 젓는 사람들이 교대하기 전까지 배가 나간 거리)'를 뜻한다. 이 어원은 weik, wik로 독일어 계통의 동사 wikan 파생된 것인데 wikan은 '돌다'를 뜻한다. 그리고 노드딕 계통 언어에서도 wikan은 '돌다'를 의미해서 언어적으로 더 증명이 된다. 따라서 바이킹이 항해를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 어원이 더 맞다고 본다.
18세기 영어에선 바이킹을 "미개한 전사" 또는 "고귀한 야만인"으로 불렀다.
그러나 바이킹은 스스로 농부라고 했고, 말린 대구포와 유럽에는 없는 표범의 털가죽, 동물의 털가죽, 밀랍을 가지고 유럽 남쪽으로 내려와서 교역을 하던 상인들이었으며 빈란드(지금의 아메리카)를 처음 찾아간 탐험가들이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책 <COLLAPSE: 문명의 붕괴>에 바이킹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어 부분 참고했다.
바이킹들이 약탈하게 된 것은 교역을 통해서 돈을 받았지만 물건을 주지 않고도 가능하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서기 793년부터 바이킹들은 아일랜드, 발트해를 시작으로 지중해와 콘스탄티노플까지 내려갔다. 바이킹들이 사는 노르웨이는 해안선이 아주 복잡하고 들쑥날쑥 피요르드가 많아서 처음부터 항해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약 700년 경 긴 소빙하기기 끝나고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농기구가 발달해 식량이 증가하고 인구가 늘어났다. 노르웨이는 국토의 3%만 농사가 가능했기 때문에 스칸디나비아 밖의 비옥한 땅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돛과 노를 동시에 사용하는 유럽에서 가장 빠른 배를 이용해서 유럽과 영국의 호화로운 수출품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강이고 바다이고 간에 수심의 깊이에 관계없이 물만 있으면 고속도로처럼 다녔다.
해양 민족의 특성이 서서히 나타난 것은 스칸디나비아 상인들이 모피를 주지 않고도 금과 은을 빼앗아 올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이킹들의 배는 해적선이 되어서 약탈을 하기 시작했다.
빠르고 민첩하게 약탈해서 재빨리 달아났다. 느린 배를 가진 유럽인들은 바이킹들의 본토에 가서 공격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더구나 바이킹들은 하나의 왕 밑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고 부족장들을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해적들은 앞다퉈 생겨났다.
훗날 러시아의 초석이 된 스웨덴의 바랑족(Varangian) 바이킹들은 러시아에서부터 강을 따라 내륙으로 갔고 남쪽의 흑해와 카스피 해로 흘러가는 볼가강과 다른 강들을 따라 비잔틴 제국과 거래하면서 결국 키예프 루스(키예프 대공국)를 세웠다.
덴마크에 기반을 둔 바이킹은 서쪽으로 나가서 유럽의 해안과 영국의 동쪽으로 향했다. 라인강과 루아르 강의 하구를 찾아내서 노르망디와 브르타뉴에 정착했다. 그래서 동잉글랜드에는 데로인을 세웠고, 프랑스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다. 더 나아가 스페인 해안을 돌아서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지중해로 들어가서 이탈리아를 습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랍이 차지하고 있던 시칠리아 섬을 정복해서 팔레르모를 거점으로 노르만 왕국을 세웠다.
노르웨이 바이킹들은 아일랜드와 영국 북쪽과 서쪽 해안으로 향했고 더블린에 무역 기지를 세웠다.
이렇게 유럽 각지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토착민들과 결혼을 해서 그 지역에 동화되어 갔다. 이 때문에 스칸디나비아 언어들과 스칸디나비아인으로 구성된 정착촌은 유럽 대륙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스웨덴 바이킹은 러시아와 합쳐지고, 덴마크 바이킹은 영국과 섞였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바이킹은 고유 언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스칸디나비아 언어가 영어에 남아 있기도 하다.
어색한(awkward), 죽다(die), 달걀(egg), 스커트(skirt) 등 많은 단어가 남아 있다.
그러나 유럽으로 떠나는 여행 과정에서 배가 바람에 떠밀려 갈길을 못 가고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땅에 도착하게 되었다. 영국 위쪽에 있는 페로제도는 800년까지 무인도였다. 아이슬란드는 870년경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그린란드는 이누이트 족이 북쪽에 살고 있었을 뿐 대부분 텅 비어있는 땅이었다. 빈란드(북아메리카)는 1000년 경에 도착했지만 이미 인디언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바이킹은 10년 만에 그곳을 떠나야 했다.
바이킹들이 약탈을 멈춘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빈란드와 그린란드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빈 손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위축되어 있었다.
또 하나는 프랑스, 영국, 독일이 힘을 막강해지면서 바이킹들을 쫓아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857년 프랑크족이 프랑스를 관통하는 센 강에서 바이킹을 몰아냈고,
891년 벨기에의 루뱅 전투에서 바이킹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고,
939년 브르타뉴에서 바이킹을 완전히 쫓아냈다.
결정적으로 1066년 9월 25일 잉글랜드 군대는 바이킹들이 정착한 요크(York) 동쪽 스탬퍼드 브리지(Stamford Bridge)에서 바이킹의 마지막 침략군을 패배시키고 그들의 왕까지 죽인 이후로 바이킹 침략은 끝났다. 당시 노르웨이 바이킹은 하랄드 왕이 이끄는 300척의 수송선에 9000명의 군사를 동원했고, 잉글랜드의 헤롤드 2세는 10,500명의 보병과 3,000명의 기사를 동원했다. 이 전투에서 바이킹 8,000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침략은 무모한 짓이란 깨달음을 안겨준 전투였다.
피 튀기는 전투를 끝낸 군사를 이끌고 3주 동안 남쪽으로 350km를 걸어온 지친 병사들을 기다리는 것은 옛 바이킹의 후손인 노르망디의 공작, 윌리엄이었다. 영국의 남쪽 끝에 있는 해안마을인 헤이스팅스에서 유명한 전투가 있었고 헤롤드 왕이 죽고 잉글랜드는 패배했다.
어쨌거나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 이후 스칸디나비아 왕국들은 정상적인 국가로 발전하면서 유럽의 다른 나라와 교역을 했다. 중세 노르웨이는 두려운 침략자가 아니라 건조한 대구를 수축하는 나라로 알려지게 되었다.
북유럽의 대구가 많이 나는 곳이다.
크기도 보통 25kg 정도 되는 큰 대구들이 마구 잡히는 곳이다.
지금까지 먹어본 대구포 중에선 최고로 맛있었다.
사실 건조한 대구는 오래전부터 노르만 인들의 주식이기도 했다. 아무 곳이나 걸어둬도 바로 꽁꽁 얼 테니까 명품 대구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닐 듯하다. 얼리고 풀리고를 반복해야 되는데 노랗게 변할 때까지 4-6주 걸어둔다. 이런 문화는 우리와 다를 바 없다. 소문난 아이슬란드 대구포는 세상 사람들의 입맛을 잡고 있어서 공항 면세점에서도 판매를 하고 있다.
아이슬란드가 대구 말린 것을 팔기 시작한 것은 1300년대 이후에 일이다.
처음에 정착한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기 위해서 갔던 사람들이다. 처음에 갔을 때 전체의 면적의 1/4이 숲이 었었다. 우리로 치면 대략 강원도와 경기도를 합친 면적만큼 숲이 있었다. 그러나 땅을 일궈서 밭을 만들고 또 땔감을 구한답시고 나무를 다 베거나 불태워 버려서 지금은 국토의 1%만 숲이다. 아이슬란드가 황량한 이유이다.
나무가 사라지고, 양은 풀을 뜯어먹고, 돼지는 나무의 뿌리까지 먹고. 황폐해져 버렸다.
대구를 잡으려면 배가 필요한데 배를 만들 나무가 사라져 버려서 노르웨이, 영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배로 대구를 잡아 수출하는 방법을 택했다. 아이슬란드가 배를 가지게 된 것은 불과 100년 밖에 안되었다. 아이슬란드는 농업도 안되고 목축도 별 볼 일 없는 나라가 되었다. 현재는 어업이 주종이다.
아일랜드 역사를 보면 유럽 최초로 북아메리카(빈란드)로 갔다 온 사람이 아이슬란드 바이킹이다. 전승 이야기 사가에 따르면 라이프 에릭손(붉은 털 에릭의 아들)이 콜럼버스 보다 500년 먼저 다녀온 것으로 알려졌다.
붉은 털 에릭은 아이슬란드 부족끼리 싸움에서 밀려나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서 그린란드에 정착한 최초의 유럽인이다. 물론 그곳에도 이미 아시아에서 온 이누아트 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북아메리카를 빈란드(Vinland: 포도가 나는 땅)라고 불렀는데 포도가 많이 자랄 것 같은 상상력이 작용해서 빈란드라 했다. 또는 그들이 갔던 빈란드는 지금의 북 아닌 진짜 포도와 같은 열매가 나는 곳이었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거나 아이슬란드에 전승되는 사가(Saga)에 따르면 빈란드에 가서 정착하지 못한 이유는 이미 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바이킹들은 인디언들과의 싸움에서 게임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빈 손으로 와야 했다.
사람들이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 가면 고향의 지명을 쓰고 고향의 종교, 생활문화를 유지하길 원한다. 아무도 살지 않던 아이슬란드에 바이킹이 정착했을 때는 가능한 이야기였지만 아메리카 대륙에는 그런 방식이 적용이 되지 못했다.
아이슬란드에 가면 씨름하는 동상을 가끔 만난다. 우리와 비슷한 기술을 쓰는데 가죽으로 만든 일종의 샅바를 사용해서 다양한 기술을 구사한다.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은 얼음 위에서 씨름을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조랑말이 많다.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져온 조랑말은 아마도 오래전 훈족의 후손 중에서 북으로 와서 정착한 사람들의 남겨놓은 유산일 것으로 확신이 된다. 학자들 중에선 바이킹 중에서 아시아 유목민들이 들어와서 일구었다는 설을 제시한 학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 감라 웁살라(Gamla Uppsala :옛 웁살라)에 있는 거대 봉분을 한 거대 무덤은 신라 경주에 있는 무덤군을 쏙 빼닮았고 그래서 스웨덴 왕자가 와서 경주 서봉총 왕관 발굴에 동참하기도 했다. 서봉총이란 이름도 스웨덴의 한자어 서전(瑞典)의 서와 금관에 있는 봉황의 봉이 합쳐진 이름이다. 또한 스칸디나비아는 빛살무늬(햇살 무늬) 토기가 전달된 가장 먼 곳이기도 하다. 스웨덴 국립박물관에 가면 빛살무늬(햇살무늬) 토기가 여럿 진열되어 있다.
노르웨이를 달리다 보면 만다는 풍경들이다. 바다 근처를 내달리는 도로와 산들이 무너질듯한 풍경은 장관이다.
빙하를 보러 언덕에 올라갔을 때 사방에 널린 블루베리를 만났다. 점심 식사를 한 후여서 디저트로 10여분 배부를 정도로 따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