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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은 상징을 찾아가는 인문학이다
러시아

용의 도시 러시아 카잔

by 두루가이드 2018. 7. 14.

<용의 도시 러시아 카잔>
**월드컵 강팀들이 몰락한 기마민족들의 땅**

 

(: 카잔 문장. : 카잔 크렘린 항공사진)

러시아 카잔에서 열리는 월드컵 경기에서 강팀들이 몰락하는 장면을 보고서 몇 년 전 겨울에 다녀온 카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졌다.

 독일

0 - 2 

한국 

 브라질

1 -

벨기에 

 아르헨티나

3 - 4 

프랑스 

 

카잔은 어떤 곳일까?
카잔은 유럽에서 가장 긴 강인 볼가강이 지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모스크바 동쪽 715km 떨어져 있다.
2009
년엔 러시아 정부가 공식적으로 러시아 제3의 수도라는 명칭을 받은 도시이다. 지금도 그렇게 부르곤 한다.


카잔은 사람이 살기 좋은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다. 기온은 우리나라 날씨와 매우 유사하지만 습도가 적기 때문에 공기는 쾌적하다. 여름에는 평균 20도로 따뜻하고, 겨울에는 평균 -10도로 조금 쌀쌀하다. 필자가 겨울에 갔을 때는 영하 10도 아래였지만 그리 춥지 않고 다니기 좋았다.


러시아 월드컵 공식 오프닝 영상을 보면 용이 입에서 불을 뿜는 장면이 지나간다.
그 용이 카잔의 상징 동물이며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카잔 크렘린이 잘 보이는 지하철 입구에, 지하철 역사 벽화에, 공원에서 용을 만 날 수 있으며 심지어 거대한 청동 동복(기마민족들이 등에 달고 다니는 청동그릇)처럼 생긴 가족공원 건물과 그 주변에 용이 가득하다.
중앙 결혼식장으로도 사용하는 건물은 지구 최대 용 조형물이면서 카잔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카잔 크렘린을 배경으로 크렘린 지하철 역 입구에 새워진 용)


(
천년기념 공원-중앙에 있는 청동 그릇을 용이 떠 받치고 있고 8각형 모서리에 각각 용들이 물을 뿜어내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마치 천단을 생각하게 한다.)

용을 보면서 ~! 카잔을 만든 사람들은 동양인 중에서도 기마 민족이었겠구나!”라고 생각했다면 뭐 좀 아는 사람이다.
실제로 카잔은 아시아 기마민족들이 많이 사는 타타르스탄 공화국의 수도이다.
타타르 민족은 몽골이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했을 때 주력부대이기도 했고 생김새도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다. 유럽에선 몽골이 오면 타타르가 온다고 했다.

폴란드에서 한 때 유럽에서 싸움 좀 한다는 기사단들 집합과 몽골 타타르와 전투를 했는데 유럽 기사단들이 제대로 싸움 한번 못해보고 몰살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 후로 타타르인들을 증오하는 의미에서 타타르 육회가 만들어졌다.
타타르라는 용어가 처음 나온 것은 몽골 울란바토르 국립박물관에 가면 만날 수 있는 퀼테긴(Kul Tigin)이라는 인물의 묘비석에 등장한다.
(현재 국립 중앙박물관에
<칸의 제국 몽골> 특별 전시를 하는데 퀼테긴 두상을 전시하고 있다. 그 묘비석 탁본도 함께 전시 중이다.)


(몽골 울란바토르 국립박물관 퀼테긴)


그는 돌궐 제
2국을 통합하고 재건하는데 평생을 바쳤던 퀼테긴을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형 빌게 카간이 서기 732년 그 자리에 모인 고관들과 백성들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만든 비문이다.
그 곳에 타타르 30개 씨족, 타타르 9개 씨족이라는 용어가 나옴으로서 타타르는 부족 연합체였음을 알게 한다.

그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 튀르크-몽골 기마제국과 왕국들이 존재할 때 줄 곧 같이 있었다. 1206년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세울 때도 타타르 부족을 합쳤다.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칸이 이끄는 부대가 서방으로 원정 갈 때 많은 부족들이 참여했는데 그 때 타타르도 자연스럽게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런 타타르 부족은 지금도 몽골족, 우즈벡족, 하자라족(페르시아 말로 1천을 의미하며 몽골어로 천인대)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


전세계 6,800,000만 타타르족 중에 러시아에 살고 있는 타타르족은 약 5,300,000명에 달한다.
러시아에 압도적으로 많이 살고 있는 이들을 볼가 타타르족(Volga Tartas)이라 하는데 볼가강 일대인 타타르스탄 화국과 비시키르 공화국 주민들이다.
특히 타타르스탄 공화국 인구의 53%를 이루고 있다. 언어는 타타르어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공공장소에 가면 두개의 언어로 표기된 것을 볼 수 있다.

나머지는 1,500,000만은 대다수가 구소련 연방국가에서 살고 있다.
타타르족이 많이 사는 나라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우즈베키스타,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터키, 투르크메니스탄, 키르키스탄, 아제르바이잔, 루마니아, 몽골, 이스라엘, 벨라루스(백러시아), 프랑스, 리투아니아, 중국, 캐나다, 에스토니아, 폴란드, 불가리아, 핀란드, 일본, 오스트리아, 체코, 스위스이다.

러시아에선 러시아인과 타타르족이 오랫동안 피가 섞여 왔다고 믿는다. 그래서 유명한 이야기로러시아인 피부가 살짝 긁히면 그 속에서 타타르인의 모습이 나타난다.”라는 말이 있다.

이 이야기가 사실임을 증명하듯이러시아 차르국’(또는 모스크바 차르국으로 16세기 이반 4세가처음 쓰기 시작한 뒤로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 제국을 건설할 때까지 사용한 러시아의 공식 국가칭호)의 귀족들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귀족들 중 많은 수는 타타르족 출신들이었다. 그럼에도 현재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은 우크라니아인, 폴란드인, 백러시아인북쪽 러시아인들의 인종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이유는 러시아에 사는 인종간의 결혼이 매우 빈번하기 때문에 타타르족과 슬라브족의 뿌리가 러시아속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타타르족과 러시아인 사이에 결혼은 흔한 일이다.

러시아가 이렇듯이 카잔도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 같은 곳이다.
카잔은 유라시아 대륙을 넘나드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많은 기마민족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좌: 대 불가리아의 군주 쿠브라트 칸의 칼-환두대도. 우: 찰갑을 입은 사르마트 군사의 칼-환두대도)


스키타이, 사르마트, 훈족, 볼가 불가리아, 몽골, 킵차크 한국 등 다양한 집단들이 지나 다니면서 다양한 흔적을 남겼다. 이런 것들은 타타르스탄 국립박물관, 크렘린 기마민족 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다.
카잔은 볼가 불가리아(Volga Bulgaria)인들이 11세기초(1003-1005)에 건설했다고 알려져 있다. 10-13세기에 볼가불가리아의 북방 전초기지로 만든 요새화된 작은 도시였다. 그 후 요새(지금의 크렘린)는 몽골이 들어와서 파괴된 후 카잔 칸의 거처로서 새롭게 만들어졌다. 15세기까지 도시는 불가리아 이슬람 공국의 행정, 군사, 교역의 기능을 하던 수도였다.
15
세기 중엽에 러시아는 킵차크한국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요새도 커지고, 카잔 칸들의 무덤이 있는 큰 모스크도 세웠다.

 

(: 카잔 크렘린 내부에 있는 퀄사리프 모스크, : 수태고지 정교사원)

 

16세기 중반(1552) 이반뇌제(이반4)에 의해서 점령당하고 볼가 지역은 기독교 관구가 되었다. 이후 크렘린은 기독교 수도원이 있는 정교회 중심지이자 요새의 역할도 했다.
이반뇌제는 카잔을 점령한 것을 기념해서 모스크바 붉은 광장 한쪽에 성 비실리 성당을 세웠다.

(이반 4세:이반뇌제가 카잔을 정복한 기념으로 세운 성 바실리 성당-모스크바 붉은광장)

 

오늘날 카잔 크렘린을 비롯한 카잔 시내는 이슬람 사원과 정교사원이 공존하는 독특한 장소가 되어 있다.
카잔은 이미 922년에 이슬람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현재 카잔은 수니파 이슬람과 러시아 정교가 주축을 이룬다. 그 외 로마 카톨릭, 신교, 유대교 등이 있다.



(위 그림: 모든 종교의 사원)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공존하다 보니 다른 곳에는 없는 특이한 건축물도 만들었다. 모든 종교의 사원이라는 건물로 이슬람 모스크, 정교 사원, 유대인 시나고그와 기타 종교 건축물의 특징을 합한 것이다. 이름 그대로 사원은 하나의 종교만 수용하는 곳이 아니라 문화와 진실의 사원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문화의 평화적인 결합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를 위한 센터역할도 하고 있다.

(: 카잔 크렘린 교회. : 기울어진 소옘비카 타워. 왕실 모스크 이기도 했다.)


카잔은 러시아에서 3번재로 만든 대학교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다음에 만들어진 곳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이 대학과 인연이 있다.

레프 톨스토이와 블라디미르 레닌이다. 그런데 둘 다 법학과를 다녔지만 졸업을 하지 못했다.
<
전쟁화 평화>, <안나 카레니나>로 유명한 톨스토이(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은 법대를 다니다 중퇴를 했다. 이유는 인간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억압하는 대학교 교육방식에 실망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천재 레닌 역시 법대를 다녔지만 입학한 해 12월에 데모를 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제적되어 쫓겨났다. 사실 데모를 주동하지 않았음에도 매우 부당하 처사였지만 그의 맏형인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가 차르 알렉산더 3세 암살계획 혐의를 받고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레닌의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이다.
레닌이라는 이름은 그의 30-40개 필명 중에 하나이다.
그가 레닌이라는 필명을 쓴 것은 어린시절 레나강이 있는 시베리아로 유배당하고 나서부터다.

 

 

(레닌의 어린 시절과 장년)

러시아가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 이듯이 레닌의 집안 역시 동양과 서양의 혼혈이며 식구들은 머리가 비상한 천재적인 사람들이었다.
아버지가 튀르크계이고, 할머니는 몽고계이다. 어머니는 프랑스 유태인이다.
레닌은 백인이라기 보다 황인에 가깝고 사진을 보면 황인의 모습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나고 자란 곳은 볼가강 하류에 있는 아스트라 칸이라는 곳이다. 도시 이름에서 짐작하겠지만 아스트라는 아사달의 음사이다. 아스트리 칸은 흑해로 연결되는 실크로드 상의 도시였다. (위 지도에서 아래에 자리한 도시)

레닌의 아버지 일리야 니콜라예비치는 중학교 다닐 때 교장선생님이 천재학생이라며 아꼈다. 교장선생님은 니콜라예비치가 장학금 받을 수 있게 하려고 교육감에게 서류를 제출했지만 당시 장학금은 귀족자녀들이 교육비를 아끼려고 만든 제도였기 때문에 거절당했다. 할 수 없이 카잔 대학교 물리수리학과에 입학하고 가정교사로 일하며 고학을 했다.


노력에 대한 성과는 크게 돌아왔다.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했고 학교에 남아서 교수이 신분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지방 장학사가 되었다. 레닌의 아버지는 교육제도를 개선하고 교육경비를 조금이라도 더 받을 려고 지방자치국 문턱이 닳도록 뛰어다녔다. 겨울의 추위와 초봄의 차가운 강물을 넘나들며 매우 열심히 살았다. 그가 그의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은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라.”였다. 우리의 홍익인간 정신을 실현하려던 사람처럼 말이다.

 

 

레닌의 어머니는 정숙하고 우아한 여인이었다.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에 정통했고 피아노 실력도 뛰어났다. 아이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치기 위해서 독일어의 날, 프랑스의 날, 영어의 날을 정해서 가르쳤다. 그런 영향으로 레닌은 나중에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에 능통했고 후일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 망명생활 때 의사 소통에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이런 교육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33녀는 전부 천재적이었다.

레닌 역시 중학교 때 영예학생으로 뽑혀 최우수 졸업을 했다. 그리고 1년 반 만에 4년간의 대학 과정을 모두 이수해 카잔 대학의 우등상을 타기도 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혁명에 가담하게 된 것은 레닌 자신이 잘 따르던 맏형이 차르 알렉산더 3세 암살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한 이 후부터다.
독서광인 레닌은 학교에서 쫓겨난 후 마르크스를 공부해서 결국을 마르크스 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30년 동안 세 번 체포되고, 두 번 유배를 당했으며, 세 번 망명을 했다. 이렇게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그는 러시아의 발전 노선을 찾는 일을 단 한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191710월 혁명으로 직접 새로운 시대를 연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
후진국이었던 러시아가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냐?”고 물을 때
천재적 리더 레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이야기한다.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이었다면 불가능한 사건이었다
. 마르크스는 러시아에서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유는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자 계층을 기반으로 하므로 산업이 발달한 유럽 선진국에서 먼저 해야 된다고 한다는 거였다. 이에 대해서 레닌은 왜 한번 해보지도 않고 불가능하다는 걸까? 먼저 러시아 내에 혁명의 환경을 조성한 다음 국민, 즉 농민들을 프롤레타리아로 변화시키면 되지 않을까?라는 것이 레닌의 생각이었다.

혁명의 리허설은 1905122일 일요일에 있었다. -일 전쟁이 한참일 때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엔 배고픈 15만 노동자와 그 식구들이 겨울궁전으로 형화로운 행진을 하고 있었다. 자애로운 아버지라 여기던 차르 니콜라이 2세를 만나서 여러가지 요구 사항을 전달하려 함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얼굴은 안보이고 시위대를 기다린 것은 총알 세례와 말 탄 군인들이었다. 거리는 노동자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황제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데 충분했다. 이것이 제1차 러시아 혁명이다.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을 두고 레닌은 “1905년 리허설이 없었다면 191710월 혁명의 승리는 없었을 것이다.” 말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가 더 이야기한다면 혁명은 가진 것이 있는, 지식인 층이 시도 했을 때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그런데 가질수록 지켜야 할 것이 많을 수록 사람은 보수로 변하기 때문에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아니면 변화는 매우 귀찮은 것이다. 그래서 늘 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이다. 가진 것이 없어야 불합리한 세상을 보게 되고 그래서 세상을 바꾸려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