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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은 상징을 찾아가는 인문학이다
대한민국

대한제국의 상징 오얏나무 꽃에 담긴 상징 이야기

by 두루가이드 2018. 9. 7.

<대한제국의 상징 오얏나무 과 조선총독부의 상징 벽오동나무 꽃에 담긴 숨겨진 이야기>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인간은 상징의 동물이다."라고 정의한 철학자가 있다.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 1874-1945 유대계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


그의 이야기는 여행을 하다가 만나는 다양한 상징을 그냥 지나치지 않게 한다.
-인간은 한갓 물리적 우주가 아닌 상징적 우주에 산다.
-
언어, 신화, 예술, 종교는 이 상징적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인간 문화는 인간 활동의 결과물로, 인간의 상징적 기능의 결과물이다.
-상징주의는 인간 문화의 본성과 본질을 파악하게 하는 열쇠다.
-인간은 심볼을 사용함으로써 구체적인 세계를 떠나 추상적인 세계에서 놀 수 있다.

인류는 태고적부터 다양한 많은 상징을 남겨왔고 지금도 상징을 만들어 가고 있다.
선사시대 암각화에 남겨진 그림에서부터 종교, 신화, 예술, 언어의 표현은 물론이고 가문의 문장, 국가의 국기, 국가의 국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 사람의 이름과 지명도 상징의 산물이라 하겠다.
이 순간에도 간판, 회사 로고, 명함 등 지속적으로 상징은 생산되고 있다.

TV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오얏나무 꽃이 조선왕실(대한제국)의 상징이라는 이야기를 나온다.
李라는 글자가 '오얏나무 李'이기 때문이다.

(미스터 선샤인 중에서)



(오얏나무 꽃=자두나무 꽃)

 

(덕수궁 석조전에 새겨진 오얏 꽃)

오얏나무 꽃과 벚꽃은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유사하다.
오얏나무 꽃을 잊어버리라는 의도로 벚꽃을 많이 심었을까?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에 박살난 분풀이를 하려고 했는지 일본은 진해에 벚꽃을 엄청 심었다.
국회가 있는 여의도는 왜 심었어?
우리나라 국회가 그래서 사꾸라가 되었을까?

이 씨 성의 시조는 老子로 알려져 있다.
노자의 어머니가 오얏나무(자두나무) 밑을 지날 때 산기가 느껴져서 아들을 낳았는데 귀가 이상하게 생겼다고 한다. 오얏나무(李) 아래서 태어났고 귀(耳)가 이상하게 생겼기 때문에 이름을 이이(李耳)라 했다. 
또 다른 이야기로 어머니 뱃속에서 72년 살다가 어머니 옆구리로 태어났는데 늙어서 태어났기 때문에 老子라 했다. 
오얏나무는 자두나무이다.
자두는 본래 자도(紫桃 : 자줏빛 복숭아)라 했다. 지금도 자도라 부르는 지방이 있다.
자두의 열매가 복숭아처럼 생겼고 자주색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자두는 용과 봉황이 찾는 여의주를 표현하는 색(자색)이기도 하며 모양도 여의주와 유사하다.


(자줏빛 복숭아라 부르는 자도(紫桃)=자두)


자줏빛은 하늘의 색이다.

하늘의 명당이자 예부터 하늘의 제왕으로 여기던 옥황상제 (또는 옥황대제, 황천상제)가 기거하며 우주를 다스리는 곳 자미원의 색이다.
자미원(紫微垣)에서 자는 자줏빛 자(紫)이다.
자미원은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있는 곳으로 1년 내내 보이기 때문에 예부터 하늘의 중심이라 생각해 왔다.
조선시대 초에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별자리들이 자미원이다.

하늘에는 제왕 천제(天帝)가 있다면 지상에는 천자(天子)가 있다.
천제가 직접 지상세계를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대리자를 내려보내서 다스린다는 개념이다.
천제인 옥황상제의 명령을 받고 지상을 다스리는 황제를 천자(天子)라 했다.
이는 동서양이 존재해온 개념이다.

그래서 하늘에 자미원이 있다면 땅에도 자색으로 둘러쳐진 자미원이 있어야 된다.
대표적으로 조선시대 경복궁은 지상의 자미원에 해당된다. 
그런 천자의 상징이 용과 봉황이다.
경복궁에 가장 많이 발견되는 동물도 용과 봉황이기도 하다.

경복궁이 지상의 자미원이다 보니 궁전 외부와 내부는 자주색을 가장 많이 사용했다.
북경의 자금성(紫禁城)도 자색으로 둘러친 금지된 성이라는 의미이다.

(지상의 자미궁인 경복궁 중에서도 가장 중심인 근정전 내부)
(자색으로 채색된 자금성의 중심 전각 태화전)

조선왕조 시작부터 사용하지 않고 대한제국 때 사용했기 때문에 결과적인 이야기이지만  오얏나무 李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지상의 자미원(경복궁)에서 조선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는 것은 마치 이미 계획된 설계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오얏나무 꽃이 대한제국의 왕실상징이 되었을까?
조선왕조 시작부터 사용하지 않고 대한제국(1898년)이 되면서 여러 이유에 의해서 오얏나무 꽃을 사용하게 되었다.
일본 침략자들이 벽오동나무 꽃이었기 때문에 사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벽오동은 천자의 상징인 봉황이 날아드는 나무라 여겨왔기 때문이다.
여기에 맞서서 
고종은 천자국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경복궁을 정비하고 지상의 자미원에서 나라를 다스린다는 의미에 부합하는 자줏빛 열매(자두)가 열리는 오얏나무 꽃을 대한제국이 상징으로 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성이 李씨이니 지극이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오얏나무 꽃의 꽃잎은 다섯 개로 천자를 의미하는 오황극(五皇極)의 숫자이다.
황극의 숫자 5는 조선왕조를 세울 때 이미 적용했던 개념이다.
태조 이방원 어진에서 용포에 새겨진 용의 발톱이 다섯 개로 그려져 있다.
이는 5황극으로 천자를 의미한다.
경복궁에서 왕의 처소의 명칭인 강녕전도 홍범구주에 의거해 왕이 건강해야 5황극을 세울 수 있다는 의미로 지었다.
결국 조선은 처음부터 천자국으로 시작했다.
이후 중국의 제후국 정도가 되어서 용의 발톱은 4개 이상 표현하지 못했다.
고종 때 와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용의 발톱을 7개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그 어디에도 없었던 7개의 발톱이다.
경복궁 근정전, 경희궁 숭정전 천장엔 7개의 발톱을 가진 황룡이 올려져 있다.
덕수궁 중화전엔 5개의 발톱을 가진 황룡이 올려져 있다.
반면에 창덕궁 인정전과 창경궁 명정전 천장엔 봉황(鳳凰)이 올려져 있다.

조선 초기를 제외하고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을 상징해서 용의 발톱을 4개 이상 그리지 못했다.
중국은 황제의 국가여서 5 황극을 상징하는 5개의 발톱을 가진 용이 그렸다.
북경에 있는 자금성(자색을 둘러친 일반인 출입금지 성)에 가면 온통 5개 발톱을 가진 용들뿐이다.

그러나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해서 7개의 발톱을 가진 두 마리 용을 경복궁 근정전 천장에 올렸다.
7수 움직이는 천자를 의미한다.
(좀 어려운 이야기로 황극은 5토(土)를 체(體)로 삼고 7화(火)를 용(用)으로 삼는다.)
그리고 4개의 발에 각각 7개의 발톱을 가지고 있어 용 한 마리는 28개의 발톱이 되는데 이는 하늘의 중심 자미원을 감싸서 보호하는 28개의 별자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태조 이성계의 곤룡포 .   용의 발톱이 다섯 개)
(경복궁 근정전 천장 황룡.  용의 발톱이 일곱 개)



일제는 조선을 지배하면서 조선총독부의 문장으로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용했던 벽오동나무 꽃을 상징으로 삼았다.
반면에 일본 왕실이 상징은 국화였다.
그 국화의 상징이 변해서 일본 자위대 군기가 되었다.
빛살이 퍼지는 의미라 하지만 일본 천황의 군대인 것이다.

 

(대마도 계지에 있는 응신 천황 신사에 불을 켜는 등에 부착된 오동나무 꽃 상징. 벽오동의 특징인 다섯 갈레 나뭇잎)


(오동나무 꽃)

 


(일본 왕실의 상징인 국화와 국화의 변형인 욱일기)

벽오동나무는 오래전부터 봉황이 찾아오는 나무라 여겼다. 
여기서 벽오동나무와 오동나무는 전혀 다른 나무이다.
중국은 벽오동과 오동나무를 구별하지 않고 오동나무라 했다.
그런 흔적은 중국 문헌에 많이 남아 있다.

 중국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에 "봉황이 저 높은 곳에서 우는데 거기 양지바른 곳에 오동나무가 자란다."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장자가 양나라 재상과의 대화에서도 나온다.
" 남쪽에 원추라는 새를 알고 있는가?
원추는 남해에서 출발해서 북해까지 날아가는데 오동이 아니면 머무르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단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있다.
원추는 군자를 상징하는 봉황이다. 여기선 군자의 깨끗함과 절개를 이야기하고 있다.
오래전엔 집 앞에 벽오동을 심고 집 뒤에는 봉황이 먹는 대나무를 심곤 했다.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먼 조상인 태호복희씨께서는 오동나무에 봉황이 머물다 가는 것을 보고 오동나무로 금(琴)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서 금은 거문고라기보다 줄을 튕기는 것이라 여겨진다. 
중국 측 문헌엔 '금슬이 좋다고 할 때' 금(琴)과 슬(瑟), 그리고 공후(공 나라 후가 만든 악기로 서양의 하프같이 생김) 등을 대충 금의 한 종류라 하고 있기 때문에 태호복희씨기 금을 만들었는지, 만들었으면 어떤 형태의 금을 만들었는지 알 길이 없다.

춘추전국시대에 오나라 왕 부차가 왕궁에 오동나무 숲을 만들고 금천(琴川)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이 외에도 고전에는 오동나무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중국 쪽에서 이야기하는 오동나무는 벽오동(碧梧桐)을 말한다.
벽(碧)청록색 옥을 의미한다. 
줄기가  비취색에 가까운 초록색이며 나뭇잎은 세 갈래 또는 다섯 갈래로 생겼다.
그런 모습 때문에 벽오동나무에 대한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를 짓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벽오동은 봉황이 아니라도 민간에서도 많이 심었다.

(줄기가 비취색인 벽오동나무. 잎사귀에 붙어서 열리는 열매)

조선시대 때 벽오동이 많았는데, 그만큼 벽오동에 대한 시도 많았다고 한다.
송강 정철은 귀양지에서 벽오동을 심고 봉황의 상징인 당시 임금이 불러주기를 기다리면서 시를 썼다.
"집 밖에 벽오를 심었으나, 봉황은 아직 오지를 않고, 한 조각의 달만 무심하게 뜨니, 한밤중에 혼자 배회하고 있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딸을 낳으면 집 앞에 오동나무를 심고 아들을 낳으면 잣나무를 심었었다.
잣나무(잎이 다섯 개)는 아들이 자라서 나중에 죽었을 때 관으로 짜서 같이 묻었다는 나무이다.

오동나무는 딸이 자라서 시집갈 때 가구를 짜서 보냈다.
그래서 오동나무를 딸 나무라 했다. 

오동나무는 잎사귀가 매우 크며, 나무는 단단하면서 지구 상에서 가장 빨리 자란다. 잡초처럼 자라는 속도가 눈에 보일 정도이다.  6년이면 목재로 사용할 수 있고 10년이 지나면 거대해진다.

그런 오동나무의 원산지가 한국이다. 

오동나무는 대략 16종류가 있으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대규모로 나무를 심는다.  
유럽을 여행하다가 좌우로 정열이 되어있는 오동나무 군락(숲)을 보면 우리가 하지 못하는(안 하는 것인지) 모습에 한편 부럽기도 하다. 

처음엔 이탈리아 북부에서 주로 심었다. 
자녀들이 자라서 시집 장가갈 때 목재를 팔아서 결혼자금으로 쓴다고 한다. 
아마 이탈리아도 우리처럼 예전엔 나무를 베어서 시집 장가가는 자녀들이 사용할 가구를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는 가구가 유명한 나라이니 오동나무는 고마운 나무임에 틀림없다. 지금도 상업적으로 가구를 만들거나 집을 지을 때 사용할 목적으로 대규모로 심고 있다.

 

(유럽에서 만 날 수 있는 오동나무 묘목 군락. 비가 올 때 우산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을 만큼 잎사귀가 크다.)
(왼쪽-2년생 묘목. 오른쪽- 심은지 2년 만에 크게 자란 오동나무 )

이쯤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벽오동 꽃을 자신의 상징으로 삼은 이유를 알 수 있다.
용과 봉황은 천자의 상징이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자를 꿈꿨던 것이다.
그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지배하고자 했으나 실패를 했다. 
312년이 지나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합병(1910년 한일 강제합병)을 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꿈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상징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상징인 벽오동나무 꽃으로 삼았다.
한일 강제병합 때 데라우치(초대 총독)는 남산 총독관저에서 파티를 열고 “고바야카와, 가토, 고니시가 세상에 있다면 오늘 밤의 달을 어떻게 보았을까”라며 거드름을 피웠다.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의 왜장들이 못 이룬 꿈을 해냈다는 오만이었다.

(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상징 벽오동 꽃 / 우: 조선총독부 상징 벽오동 꽃)

그리고 조선시대 까지만 해도 흔했던 오동나무가 잘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일본이 다 베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해야 되는 것일까? 일본만이 봉황이 날아와야 된다는 생각을 했을 테니까 말이다.

일자무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자를 꿈꾸며 일본을 평정하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것에서부터 잘못된 꿈이었다. 문맹이 어찌 천자가 될 수 있나?

무엇보다 일본을 만든 스승의 나라를 치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너무 무식해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기야 유럽은 로마시대 황제들 중에서 일자무식이 많았고, 중세시대 왕들 중에서도 글은 못 읽었지만 싸움만은 잘했던 사람이 태반이었으니 임진왜란 때 상황이 이상하지 않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를 중요시하는 동양에서는 용납이 안된다.


일본의 초대 내각 총리였던 이등박문(이토오 히로부미)는 천민 출신이었지만 영국 유학 가서 대영제국이 식민지 지배와 통치방식을 잘 배웠으니 조선의 두목이 되려는 야심이 있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여러 차례 내각 총리를 역임하고 늙으막히 조선통감부를 통해 조선을 지배하려는 야욕이 있었다.
이등박문이 죽고 난 이듬해 일제에 의해  한일 강제병합조약(1910년 8월 29일)이 채결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언젠가는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망국이란 단어를 안 쓰고 이 날을 경술국치(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의 치욕)라 불렀다.
그 후로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 700만 명 이상을 죽였다.


일자무식 쟁이, 천민 출신 이등박문(이토오 히로부미) 같은 인간들의 주도하에 우리나라를 침략한 것부터 사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임진왜란(1592)보다 수십 년 앞선 1533년에 스페인 출신 일자무식한 프란시스코 피사로(멕시코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에르난 코르테스의 사촌으로 돼지치기를 하던 천한 신분이었다.)가 남미의 잉카제국을 무너뜨린 사건이 있었다.
당신 라틴아메리카에 살고 있던 사람들 중에선 우리와 핏줄이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언어와 풍습이 같은 멕시코의 아즈텍은 우리의 판박이였다.  잉카제국(본래 이름 타완틴수유: 4개의 땅)은 사람이 뛰어다니던 도로만 해도 33,000km에 달한다. 그런 잉카가 무식한 인간에게 망했다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다.
이후 남미는 300년간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어서 문화와 역사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스페인 식민지 유산은 우리보다 더 가혹해서 라틴아메리카는 지금도 깊은 후유증에 시달리는 중이다.
우리는 36년 만에 일본의 지배를 벗었지만 아직도 식민지 유산의 영향 속에 살고 있다.
그 후유증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어쨌거나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패망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면서 한민족을 영원히 지배하고 잘 나갈 것 같더니...
그런데 잘 나가던 일본이 왜 망했을까?

일본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문화가 들어가서 문화가 생긴 곳이다.
그중 백제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지금도 "구다라 나이"를 쓰는데 이는 "백제 것이 아니면 하찮다."는 뜻이다.
일본의 역사는 한마디로 한민족이 이주사라 하겠다.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2001년도에 일본 천황은 "일본 간무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는 기록이 속 일본기에 있어서 한국과 인연을 느낍니다."라는 말을 했다.
일본 왕실은 스스로 백제의 핏줄이라고 만천하에 알린 사건으로 한동안 일본이 시끄러웠다.

조선도 일본의 선생 국가였다.
은혜를 베푼 국가를 배신하는 것은 배은망덕하기 때문에 박살 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은 근대에 들어와서 서양에서 받은 문물로 선생 국가인 미국을 쳤기 때문에 배사율(背師律)에 걸린 것이다.  
사극에서 "이 배은망덕한 놈~~!!!"하고 욕하는 장면들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이것을 배은망덕 만사 신(背恩忘德萬死身:
 은혜를 저버리면 만 번 죽는다)이라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천자국이 되려 했으니 하늘이 가만두지 않는 이치 이기도하다. 스승에게 재주를 배웠는데 그 스승을 치고 그것도 모자라서 천자국이 되려 했으니 극한의 모순에 빠진 것이다.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천자국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일본이라는 땅은 화산과 지진이 땅으로 불덩어리 위에 서있는 곳이다. 그런 기운을 받은 사람들은 매우 호전적일 수밖에 없다.  즉, 폭발하는 화산처럼 참을 수 없이 외부로 힘을  뻗어야 하기 때문에 어질 인(仁) 자가 없는 나라여서 악독하게 사람들을 너무 많이 죽였다. 그것도 모자라서 우리의 말과 글 그리고 정신문화를 없애고 역사를 반토막 내 버렸다.
결국 스승의 나라였던 미국을 공격하더니 원폭 두 방 맞고 결국 패망했다.

일본이 패망한 후  한동안 오동나무 꽃을 사용하지 않다가 일본 내각에서 다시 사용하고 있다.
일본 수상의 상징 역시 오동나무 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조선총독부-일본정부/일본수상 상징에 이르기까지 오동나무 꽃을 상징으로 삼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두 말할 것 없이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고 전쟁을 다시 하려는 것이다. 좁아터지는 일본은 후쿠시마 이후 더욱더 살기 어려운 지옥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니 나와서 우리 땅을 다시 차지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동양에서 가장 힘센 국가가 되고 싶은 환상에 빠져 있다.

 천자국의 꿈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 못 차리고...

(단상에 박혀있는 오동나무 꽃)

 

그것을 잘 나타내는 행사를 매년 겨울에 오사카 성에서 한다.

일본 오사카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만든 5층으로 된 성이다.
각각의 층엔 벽오동나무 꽃과 국화꽃이 장식되어 있다. 놀랍게도 일본 천황의 상징인 국화꽃보다 벽오동나무 꽃이 더 높은 곳인 지붕 위에 장식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부터 시작된 야심을 알 수 있다.

 

매년 겨울밤이면 오사카 성 외관을 스크린 삼아 3차원 영상쇼를 한다. 오사카 성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현란하고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다.
그 영상에 
담긴 진짜 이야기는 벽오동나무에 깃든 봉황과 여의주를 문 용이 찾아와 천자국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벽오동나무 꽃, 여의주를 문 용, 봉황) 

아래 동영상의 내용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대략적인 내용이다.
"일본을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타나면서 오동나무 꽃문양이 등장한다. 오동나무 꽃이 불타면서 오사카 성이 불이 붙는다. 그리곤 봉황이 날아간다. 오사카 성이 무너지고 세워지는 역사가 반복되고 현대에 와서 히데요시의 영혼 또는 이토 히로부미의 영혼이 건물 속에서 등장하고 오동나무 꽃이 피고 봉황이 날아든다. 그리고 나무줄기가 성을 감더니 용으로 변해서 여의주를 물고 등장한다. 천자국이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봉황이 다시 등장해서 태평성대의 황금의 시대가 열리면서 끝난다." 3-D영상은 일본이 이루고자 하는 헛된 꿈을 보여준다.

일본 화투(꽃의 다툼)에서 우리가 으로 부르며 11월에 해당하는 그림도 오동나무에 봉황이 찾아든 그림이다.
일본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봉황이 찾아오길 열망해서 화투에까지 봉황을 등장시켰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우리가  이라 부르는 것이 아닐까?


일본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린 이미 봉황이 찾아들었다. 일본이 아무리 원하고 용써도 안 되는 것을 우리는 이미 하고 있다.
대통령 상징으로 봉황(鳳凰 : 암수 한쌍)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을 천자라 부를 수는 없겠지만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봉황 문양을 사용한다. 그러니까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천자의 상징을 쓰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용의 국가라고 침이 마르도록 떠드는 중국조차 용을 국가주석의 상징으로도 국장으로도 사용하고 있지 않다. 단지 중국 축구 국가대표 상징으로 용봉을 사용할 뿐이다.
우리의 봉황이 일본으로 날아갈 일은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