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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은 상징을 찾아가는 인문학이다
이란

페르시아 황제들의 영묘-낙쉐로스탐

by 두루가이드 2015. 9. 20.

낙쉐로스탐(Naqsh-e Rostam) : 페르시아 제국 왕들의 독특한 영묘



(위)낙쉐로스탐은 페르시아 제국의 전설적인 들의 무덤으로 글자의 뜻은 로스탐의 그림이라 의미이다. 

처음 이곳 명칭은 '묻는 장소' 쯤으로 불렸는데 이는 

그리스 명칭으로 네크로폴리스(죽은 자들의 도시)라고 했기 때문이다.

페르시 제국이 망하고 파르티아 제국을 거쳐 새롭게 탄생한 사산조 페르시아는 페르시아의 후예를 자처했다. 그래서 페르시아 왕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페르시아 황제들의 무덤 아래쪽 벽면에 사산조 왕들은 자신들의 공을 새겼다. 

이후 로스탐의 그림이라고 개명했다. 

돌산을 뚫은 거대한 무덤 4기가 있다.

처음 보면 용도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을 정도로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무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크세르크세스 1세, 다리우스 1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다리우스 2세의 무덤이다. 






(위)돌산을 파서 관을 안치 했는데 조로아스터 교를 신봉했던 이들은 기본 교리에 입각해서

깨끗한 공기, 깨끗한 물, 깨끗한 흙을 위해서 세상을 오염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땅에 매장하지 않았다. 

조로아스터교는 전통적으로 시신을 조장해왔다. 

지금은 조장 풍습이 사라졌다.


입구에 가면 페르시아어로 나퀴쉬루스탐(낙쉐로스탐) 팻말이 있다.


(위)페르시아 십자 모양의 무덤은 높이가 약 22미터 폭은 약 18미터 가량된다.  

아래 쪽엔 사산조 페르시아 시절 왕들의 승리한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무덤 부분에 돌조각에 대해선 아래 그림이 설명해준다.


(위)신전 또는 궁전 모습으로 장식한 무덤은 외관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우선 아래쪽 기둥은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궁전의 모습과 동일한 형태로 조각했다. 

문처럼 보이는 곳이 페르시아 왕이 영면한 장소로 들어간다.

왕좌 위에 서있는 인물이 무덤의 주인이다. 

로아스터교의 신 아후라 마즈다를 상징하는 신성한 인물이 공중에 떠있다. 왕의 앞쪽에는 

광명(光明)을 상징하는 조로아스터교의 불이 놓여있다. 

하늘에도 광명을 상징하는 태양이 떠있다.


(위)각각의 무덤 아래쪽에 새겨진 사신조 페르시아의 그림들을 몇가지 살펴본다면


(위)사산조 페르시아를 세운 아르다쉬르 바바칸(Ardashir Babakan)가 조로아스터의 신 아후라마즈다로부터 왕권의 상징인 둥근 고리을 받고 있다. 

여기 새겨진 글자에 이란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다.  

이란인들의 왕중의 왕 아르다쉬르(ardašīr šāhān šāh ērān /aryān )라고 새겨져 있다.

현재 이란이라는 용어의 시작이다.


(위)왕의 복식의 특징으로 머리에 올려진 둥그런 태양같은 모양이다. 

조로아스터교의 광명의 상징인 태양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지역의 부조에는 상투를 튼 모습으로 등장한다. 

발아래 있는 사람은 사산조 페르시아를 세운 아르다쉬르가 굴복시킨 파르티아의 마지막 왕 아르타비누스 5세이고 

아후라 마즈다 아래 있는 인물은 파르티아 제국시절 가장 큰 종교였던 무적의 태양신 미트라일 것으로 여겨진다.


(위: 타케 보스탄Taqu-e Bostan: 정원의 아치를 의미하는 곳으로 사산조 황제들의 거대한 조각들이 많은 곳이다. 이란의 서쪽 케르만샤 인근. 사산조의 왕 아르다쉬르 2세가 왕권의 상징인 고리를 받는 모습. 상투를 튼 모습으로 나온다.)


(위)사산조페르시아의 왕 샤프르(Shapur) 1세가 로마의 황제 발레리안(Valerian)을 포로로 붙잡 장명을 새겼다.   

아케메니드의 1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을 시작으로 2파르티아 제국과 로마 전쟁, 3. 사산조 페르시아와 로마 전쟁 때까지 지속적인 전쟁을 했다. 

위 장면 중에서 말 앞쪽에 두 명의 로마 황제가 있다. 무릎을 꿇은 황제는 발레리안이고 서있는 사람은 시리아 출신의 로마 황제 필립이다.  필립 이전의 로마 황제 고르디안 3세는 샤푸르 1세와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 후 황제가 된 필립은 사산조와 평화 협정을 맺었는데 이 때 전쟁 보상금으로 황금 50만 동전(아래 그림에서 돈을 주는 필립)을 주었다고 샤푸르 1세의 비문에 새겨있다.


(위)서기 240년 아데사(Edessa) 전투에서 패배한 로마 황제 발레리안은 로마 원전 전쟁 역사상 최초로 포로가 된 황제이다.

기록에 의하면 29개 유럽 부족으로 구성된 로마 군대와의 전투에서 샤푸르 1세는 대승을 거두었다.

무릎을 끓은 발레리안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중의 왕이라고 칭하던 사프르1세에게 목숨을 구걸 했다.

샤푸르는 발레리안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로마의 건축가 예술가들을 보내 올 것을 요구했다.

이 후 사산조 페르시아에 로마풍의 다양한 문화가 들어왔다. 

발레리안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비샤푸르 지역에서 볼모로 잡혀 있으면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위)낙쉐로스탐의 가장 왼쪽 벽면에 새겨진 장면으로 나르쉐(Narseh) 왕이 왕권의 상진인 둥근고리를 여성인물로부터 받고 있다.


(위)그림의 오른쪽에서 링을 주고 있는 인물은 이란의 벽 부조에서 종종 등장하는 여신으로 여져지기도 한다. 그러나 왕이 행동은 여신을 경배하는 모습이 아니다. 이로 인해서 여신이 아니고 친척이거나 여왕 샤푸르드오흐타크(Shapurdokhtak)라고 여겨진다.


 

(위)무덤이 있는 돌산 앞쪽엔 조로아스터의 카바 신전이라고 알려진 구조물이 있다. 기원전 5세기에 만들어진 구조물로 페르시아 시절에 만든 몇 안되는 구조물에 해당한다. 이 구조물은 파사르가다(페르시아의 본영)에 있는 구조물을 복재한 구조물로 다리우스 1세가 만든 것이다. 다리우스가 페르세폴리스로 옮겼을 때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옮겨온 것이다.  조로아스터의 카바라는 용어는 14세기에 나왔다. 카바는 메카에 있는 신성한 돌 카바와 같은 말이며 왕의 책이라는 "샤나메"에 등장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조로아스터 교도들이 순례 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며 조로아스터의 신전도 아니다. 

그리고 이 구조물의 한쪽 벽면엔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1세와 로마 황제 발레리안의 전쟁에 대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