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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은 상징을 찾아가는 인문학이다
몰타

작지만 위대한 몰타의 수도 발레타

by 두루가이드 2016. 5. 28.

<작지만 위대한 발레타Valletta>

 

몰타의 수도 발레타

발레타의 인구는 7,000명

16세기 오스만 터키의 공격을 막아냈던 자부심이 넘친 사람들이 만들었다.

당대 최대 강국이었던 오스만 튀르크의 공격을 막아낸 것은 큰 사건이었다.

사실 오스만 군대가 쳐들어 온 이유는 프랑스 출신 기사단들이 튀니지의 한 마을을 약탈하고 몰살 시켰기 때문이다.

오스만 군대는 복수를 하려고 시칠리아와 몰타를 애워쌌다.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고대도시 임디나의 성채에서 힘겹고 지겹게 싸워서 이겨냈다.

 

(발레타의 전경. 처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작은 요새와 병원이 있었을 뿐이었다. 16세기 터키와의 전쟁이후 4년 만에 완공시켰고 지속적으로 건물을 지었다.)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이긴 후 프랑스 출신 기사단장 잔 드 발레테 Jean De Vallstte 는  몰타를 좀더 잘 방어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동상은 도시 설계도를 주는 모습니다. 얼굴이 매우 피곤하게 찌든 모습이다. 전쟁에 지쳐버린 상태에서 도시가 완공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

 

(발레타를 만든 기사단장 발레테의 이름이 최근에 바뀌었다. 정확하게 고증이 된 이름은  쟌 드 발레테-Jean De Vallette 이다.)

 

(발레타에 먼저 도착하면 자유의 광장 또는 카스티아 광장에 이른다. 그림에서 카스티야 광장은  스페인의 카스티아와 레온 그리고  포르투갈 언어권에서 온  기사단들이 사용했던 오베르쥬 Auberge -일종의 궁전 같은 숙소-가 있다. 지금의 모습은 바로크 시대에 만든 건물로  몰타에 있는 건물중 가장 섬세한 바로크 양식이라고 이야기 한다. 현재는 수상집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을 만든 사람의 모습이 입구 위에 놓여있다. 18세기 포루투갈 출신 그랜드 마스터 <핀토 마누엘 핀토 다 폰세카> 이다.)

 

(나폴레옹이 침공한 이후 그 성 요한 기사단의 본부를 해체 시켰다. 기사단들은 종교적인 목적이외는 활동할 수 없었다. 현제 몰타 기사단-성 요한 기사단의 본부는 로마에 있다. 위 사진은 몰타 기사단 연락 사무소이다. ) 

 

(발레타의 중앙로에 해당하는 공화국 거리는 매일 사람들로 넘쳐난다. 다양한 물건을 파는 곳들이 즐비하면 식당과 cafe 박물관이 있으며 대성당,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하는 그랜드 마스터 궁전이 있고, 법원 청사, 문서 보관소등이 이 거리에 있다.)

 

(몰타를 특징 짖는 발코니. 아랍의 지배를 받았었고 아랍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 흔적이 언어와 문화에 많이 남아 있다. 발코니는 여자들이 밖으로 잘 안나가는 아랍 문화의 상징이다. 사진에서 좌측은 고고학 박물관이다. 그 외 아랍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것은 언어이다. 단어와 문법에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다.)

 

(Fun Train :  오스트리아 수입한 차로 시내를 한 바뀌 돈다. 개인적으로 온 사람들이라면  Fun Train 이용 할 것을 권한다.)

 

(몰타의 센프란시스코)

 

(성 요한 기사단들의 공동 대성당. 임디나에 대성당이 있지만 이 곳도 대성당으로 승격 시켜줬기 때문에 공동 대성당(Co-Cathedral)이 되었다.
내부가 요란하게 번쩍 거린다.
8개의 언어권에서 온 기사단들이 자금을 내서 만든 성당이며 그 들을 위한 채플(부속예배실)이 각각 8개가 있다.
성당 바닥엔 약 400명의 기사단들이 묻혀있다.)

 

(그림에 그림자를 두어서 마치 창빡에서 들어오는 빛에 의해서 그림자가 생긴 것 같은 입체적인 효과를 내었다.
이것은 바로크의 특징 중 하나이다.)

 

(성당의 각 부분은 기사단들의 지출한 돈으로 만들었는데 매표소가 있는 입구 쪽은 스페인 출신 그랜드 마스터에 의해서 지어졌기 때문에 그 마스터의 이름인 '니콜라 코토네'의 인이셜인 NC를 벽면 가득 새겨 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에서도 보이는 코토네(코튼: cotten)상징인 목화 나무 장식도 보인다.)

 

(몰타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몰타 십자가이다. 성 요한 기사단들의 십자가이기도 한데 이 8개의 가지가 벌어진 형태는 의미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성요한 기사단 구성원들이 유럽의 8개의 언어권에서 왔기 때문에 각각 8개의 언어권 기사단을 상징한다. 그것들은 각각

1 프로방스, 2 오베르뉴, 3 프랑스, 4 이태리, 5 아라곤(나바레), 6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7 독일 , 8 카스티야+포르투갈+레온 이다.

몰타 십자가에 담긴 또 한 가지의 상징은 성경 마테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8개의 복(福)을 설파한 것을 의미한다.

 

(이 성당을 찾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면 이탈리아가 낳은 바로크 시대의 천재 화가 카라바죠의 그림을 보기 위함일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처형 The Beheading of Saint John the Baptist>이라는 그림을 직접 와서 그렸는데 그가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큰 그림(520cm x 361 cm)이자 유일하게 서명이 들어간 그림이다
그가 몰타까지 와서 그림을 그린 데에는 그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천상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지만 싸움을 좋아하고 폭력을 쉽게 저질렀다. 그림보다 밖에서 보내는 일이 많았던 그는 어느날  사이가 껄끄러웠던 친구와 운동을 하다 다툼이 생겨서 살인을 하게 된다. 
성화를 너무나 잘 그렸던 그에겐 교황청을 비롯한
종교계에 힘있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너무 큰 죄를 저질러서 몸을 피해서 나폴리에 갔는데 유명 인사가 왔다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나폴리에서 편하게 지낼 수 도 있었지만
 몰타로 향했다. 
몰타에서
그림을 그려주면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였다. 기사 작위를 받으면 사면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몰타에서 성 요한 기사단들을 위해서 <세례자 요한의 처형>이라는 그림을 그려 줬을 때 당시 그랜드 마스터는 그에게 기사 작위를 내려 줬다.
그러나 그 넘의 성질 머리 때문에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기사에게 폭력을 가했고 결국 빅토리오사 끝에 있는
 성 천사의 성에 감금되었다. 감금이 된지 얼마 후 가까스로 시칠리아로 탈출했다. 
그리고
 다음날 기사단에서 카라바죠기사 작위를 거두어 갔다.
카라바죠가 시칠리아의 지인 집에 있을 때 괴한 서너명에게
얼굴이 떡이 되도록 맞아 반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그 괴한들이 몰타 기사단들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맞는 이야기 같다. )

 

(중세 때 종교화를 그리는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익명으로 했어야지만 되었는데 그는 세레자 요한이 흘리는 피로 자신의 이름(Michelangelo)을 써넣었다.)

 


(결국 교황청에 가서 사죄를 받으려고 자신의 모습이 담긴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을 시칠리아에서 그렸다.
머리가 잘린 골리앗은 자신의 얼굴이다. 이는 자신의 죄에 대한 참회를 뜻한다.
그리고 배를 타고 나폴리로 갔을 때 체포되고 말았다. 그림은 배에 실려 있었고 체포된 카라바죠는 나폴리에 남게 되었다. <골리앗을 머리를 든 다윗>을 받아든 교황은 카라바죠를 사면해 줬지만 병을 얻고 있었던 카라바죠는 이미 죽고 없었다.
결국 마지막 그림은 그의 죽음에 대한 예언이 되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처럼 말이다. )

 

**카라바죠의 본명은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 "미켈란젤로 메르시 다 카라바죠"이다.
그의 이름은 카라바죠라는 마을 출신
미켈란젤로 메르시라는 의미이다. 당시 태어난 동네 이름으로 부르던 시기여서 카라바죠라고 불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켈란젤로(15-16세기)도 당대엔 부오나로티라고 불렀다. 그러나 카라바죠와 구별하게 위해서 후대에 서로 다르게 부르고 있다. 카라바죠는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가 죽은 뒤 몇 년후에 태어 났는데 마치 미켈란젤로가 환생 한듯 이전 천제들의 그림을 능가했다. 게다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법인 빛을 그렸다. 연극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듯한 효과로 사물을 강조했는데 훗날 루벤스, 베르메르, 렘블란트, 벨라스케즈와 같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공화국 거리에서 가장 사람들이 붐비는 문서보관소 앞이다. 비토리아 여왕의 동산이 있어서 빅토리아 광장이라고도 이야기 한다.) 

 

(광장 맞은 편에 이 곳에서 가장 유명한 cafe 코르디나가 있다. 몰타기사단들의 보물창고였지만 나폴레옹 이후 몰타 기사단의 쫒겨난 후 cafe로 변한 곳이다. 광장에 있는 자리도 전부 cafe 코르디나에서 운영하고 있다.) 

 

(내부가 근사하기 그지 없다.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어서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인다.) 

 

 

(때 아닌 바람이 불어서 따뜻한 카푸치노를 시켰다. 맛이 기막히다.)

 

(그리고 달콤한 케익. 먹어보지 않고 말~을 하지 마세요.) 

 

(cafe를 나설 때 다시 한 번 감상을 한다.) 

 

(발레타를 나오기 전에 다시 찾아간 어퍼 바라크 가든을 찾았다. 이탈리아 기사단들의 휴식 공간으로 만들었던 곳으로 몰타 최고의 전망을 가졌다.)

 

( 먼 바다 쪽과 발레타를 바라 볼 수 있는 멋진 전망대.)

 

(살루떼 대포  맞은 편으로 바다로 뚝 튀어나온 두 도시 빅토리오사와 생글레아가 있다.  좌측 빅토리오사에 있는 천사의 성이 바로 카라바죠가 감금 되었던 곳이다. 대포는 하루 두 번 발사 한다. 12:00와 16:00. 12시는 정오를 알리는 대포이고 오후 4시는 이 곳을 오가는 크루즈 선들을 위한 대포이다.)

 

(그리고 밤이 되면 여지 없이 맛있는 해물 파스타를 먹으며 야경을 감상 한다. 몰타는 해물 파스타가 가장 맛있는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