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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은 상징을 찾아가는 인문학이다
이탈리아

로마의 야경과 카라바지오

by 두루가이드 2017. 1. 11.

<카라바지오의 걸작 이후 로마 야경>

 

개인적인 일로 찾은 로마를 마치 무교동과 명동을 다니듯이 어슬렁 거리면서 카푸치노가 맛있는 카페도 들리고 이름 모를 골목들을 다녀 봤다. 관광이 생명인 로마가 오래된 관습을 버리고 진화하는 모습에 로마가 다르게 보인다.

사람들만 다니는 길을 더 많이 만들어서 쾌적해 졌고, 친절해진 사람들과 영어에 능통한 사람들이 훨씬 많아진 식당, cafe, 호텔, 관광지 그리고 . . . 

이탈리아 경제가 어려워 지니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어서 사람들이 스스로 변하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사실 정치로 따지만 우리나라보다 더 황당한 곳이 이탈리아 아니던가.

국회의원만(상원+하원) 945명이지만 한 번 되면 특혜는 무지막지하다. 월급이 1600만원, 야근수당 월 600만원, 대중교통 공짜, 수영장 축구경기 공짜, 명품 다이어리 지급받고, 이발이 공짜 등등 말도 못한다.

부패지수가 세계 75위. 의회는 비효율, 낭비는 최첨단. 남쪽과 북쪽은 매일 싸우고....국회의원과 지방의원들이 쓰는 비용이 1년에 90억유로(대략 11조2,500억)나 되니 국민들이 허무한 나라이다. ㅠㅠ. 왜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지 이상할 뿐이다. 그러니

애당초 경제가 잘 굴러갈리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정치와 경제는 뗄 수 없는 역학관계가 작용하기 때문에 말이다.

가끔씩 이탈리아 길거리에서 멋진 제복을 입고 폼잡고 으시대면서 걸어다니는 고위급 경관을 보면 부패한 모습으로 보여진다.

이탈리아가 도둑 천국이 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음음 초장부터 너무 갓길로 샜다.

 

저녁이 되길 기다려서 콜로세움이 잘 보이는 곳에서 사진좀 찍어봤다.

이 곳을 그렇게 많이 다녔지만 저녁에 나를 찍어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시간을 거슬러서 방금 해가 떨어진 장면을 담은 베네치아 광장쪽으로 가보자.

무솔리니가 고대 로마의 유적지 위로 만든 길(베네치아 광장에서 콜로세움까지)을 따라 내려오면   

 

최고의 지배자라는 칭호를 받았던 트리아누스 황제의 마켓이 나온다.

로마시대 주상 복합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건물이 최근에 많이 복원이 되었다.

낮에 보는 것보다 밤에 보니 한 결 빛난다.

 

그리고 로마 스럽지 않게 흰색으로 만들어서 한 때 눈총을 받았지만 지금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 중에 한 곳이 되어 버린  빅토리오 엠마누엘 2세의 독립(통일) 기념관이다.

 

사람의 크기와 말탄 동상의 크기를 비교해보면 그 규모를 짐작하게 된다.

완성 되었을 때 인부들이 말 속에서 테이블을 올려놓고 기념 파티를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시간의 더 뒤로가서 기둥 광장 앞 알베르토 소르디 겔러리에 잠시 둘러보면 신구 조화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 사실 로마는 고대 로마의 모습은 많지 않다.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모습이 훨씬 많은 곳이 로마이다.

고대 로마의 유적은 대부분 황성옛터처럼 남아 있어서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시간을 더 거슬러서...
바티칸 베드로 성당에서 성 천사의 성으로 향하는 길에서 잠시 신발 끈을 죄여본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특별히 축사를 해서 베드로 광장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성천사의 성 쪽으로 가는 중이다.

도로에서 차량이 사라지니 이렇게 다니기 편하다.

 

성 천사의 성 근처에서 베드로 성당쪽으로 보니 길 양옆에 새워진 조명들이 사열이 멋지게 보인다.

무솔리니와 바티칸이 란테라 협정에 의해서 화합(콘칠리아치오네)의 길이라 이름지어서 만든 도로이다.

이렇게 만들면서 로마는 파시스트의 도시가 되어 버렸다.

길을 만들기 이전에 이야기를 한다면, 19세기에 독립한 이탈리아 신흥왕국이 교황령을 강제 합병시켰다. 

비록 이탈리아에 합병되었지만 교황청에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로마문제>가 약 59년간 지속되었다.

합병될 당시 교황 비오 9세는 스스로 "나는 바티칸의 포로"라고 선언했다. 

이후 59년가 교황들은 바티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무솔리니 때 국왕 빅토리오 엠마누엘 3세의 왕국과 교황청이 란테라 궁전에서 협정이 이루어 지면서 바티칸은 독립국가가 되었다. 교황청의 소유가 인정되었고 국제법상 치외 법권이 인정되었으며 이탈리아 국교는 로마 카톨릭이 되었다. 

이 란테라 협정을 기념해서 뭇솔리가 길을 만들었다.

이로서 18세기에 만들어 졌어야 할 길(교황청과 로마 중심부 연결)이 뭇솔리니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 지면서 뭇솔리니의 주가가 올라갔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바티칸 베드로 성당을 보면 돔이 중앙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베드로 성당의 중심은 식스투스 5세가 가져다 놓은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해서 설계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오벨리스크가 고대 세계 때 부턴 신성한 기둥 또는 우리의 솟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기둥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 신화에서 오벨리스크는 태양신이자 농업의 신인 오시리스의 남근을 표현한 것으로 다른 표현으로 오벨리스크는 신의 '자지'이다.

 

아래-란테라 협정 때와 영역이 다르지 않는 지금의 바티칸 시국의 모습

 

 

그리고 테베레 강 옆에 세워진 성 천사의 성.

로마 중심쪽과 연결되는 다리 위 천사들은 베르니니가 조각했다.

이 다리를 모방해서 만든 것이 프라하 다리 교각위에 세워진 조각상들이다.

 

영화 천사와 악마에서도 등장했던 곳으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각광받고 있어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린다.

원래 로마를 가장 넓게 확장시킨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사용할 목적으로 만든 원통형의 무덤이었다.
서기 138년의 일이다.

나중엔 교황의 궁전, 피난처, 감옥으로까지 사용했었다.

페스트가 유럽을 강타 했을 때 기도를 하자 미칼엘 대천사가 페스트가 사라짐을 암시하는 "칼집에 칼을 집어 넣는 환상"을 봤다는 데서 이름이 성 천사의 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로마를 관통하는 테베레 강. 로마 동북쪽 아페닌 산맥에서 내려와 지중해로 흐른다. 406 km

천사의 다리를 건너면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길을 따라 걷게 된다.

핏자 가게들과 cafe와 기념품 가게들이 있는 좁은 골목들이다.

분수로 유명한 유명한 나보나 광장과 판테온을 지나게 되는데 그 두 장소 중간에

 

이름 모를 한 성당을 만나게 된다.

7차 십자군을 나갔던 프랑스 왕 루이 9세에게 봉헌한 성당이다.

그리하여 이름도 '프랑스의 성 루이' 성당이다. 

 

이 곳에서 그 유명한 카라바지오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카라바지오에 대해선 몰타의 수도 발레타에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고향을 부르던 습관대로 카라바지오라고 불렀다.

그림으로 친다면 미켈란젤로에 뒤지지 않는 화가였던 그는 자신만의 새로운 기법을 구사했다.

바로 자연주의 그림이다. 연극에서 조명이 비추는 효과를 이용해서 그림을 그린 뛰안 화가이다.

이 성당엔 복음 저자중에 마테오를 주제로한 연작 3편을 그렸다.

아래는 <마테오를 부르심>

 

<영감을 받는 마테오>

 

<마테오의 순교>

 

성당을 나와서 몇 걸을 더 가면 판테온을 만날 수 있다.

미켈란젤로가 극찬했던 이 곳 만신전.

로마시대에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운 이 건물을 처음 봤을 때 한 참 동안 나오지 못한 기억이 있지만 지금도 가면 한 참 있다가 나오게 된다.